개들의 예감/ 연왕모 시집/ 1997년/ 문학과 지성
구덩이
연왕모
땅은 때때로 너무나 굳어
뼈와 부딪고
거친 살갗 위로 모래를 날리며
때로는 너무도 질퍽하며
발을 붙들고
살갗을 불려 물집을 내기도 한다
나는 어딘가에 빠져들고 있다
서성거리는, 따듯한 손, 검은 구둣발
무너지고 가라앉아 어둠을 담은 구덩이였으므로 나는
너의 변한 얼굴을 어직도 모른다
진흙처럼 질퍽거리며 노래부르려해도
입이 없다 입을 찾으려 하면 손이 없고 손을 찾으려 하면 눈이 없다
깡마른 어둠을 싸안고 죽음 곁에서 졸고 있는 내가
날 수 있을까
그 물, 그물 같은
많은 이의 입김으로
눅눅해진 깃털
언제쯤이면 날 수 있을까
이 시집을 서점 귀퉁이에 앉아 읽었다, 시집의 글자들을 읽다가 고개를 드니
수많은 책들이 책등을 보이며 나란히 빈틈없이 꽂혀있다,
몸이 무거운 것은 몸 안에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문제로 뽁짝거리는 것처럼
서점도 그대로 몸인 듯 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번민, 꼼지락거림, 시집의 꼼지락거림..... 오늘 이 시집은 한마디가 아니라 몸을 읽은 날이었다.
[개들의 예감]
이 시집은 낱낱의 시편을 읽기보다는 뭉뚱거려 한 권 시집.
개들의 예간이라는 시는 없다. 다만 이 시집을 읽고 나면 개들이 예감이라는 느낌이 절로 온다.
대학로 서점,
처음 만나는 시집과의 대면에 왕가위의 2046 싸운드트랙이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이음아트 낚시 의자에 앉아 다 읽는 내내 일어설 수 없었던 활자침들.
시인은 시를 읽으며 나의 몸이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시인은 시를 말하며 '무게' 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무게' 혹은 '중력' 의 작용을 받는 몸을 집중적으로 파고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도무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을 무게로 감당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깃털로 가벼이 날려보려고도 하고, 묻어버리려 땅을 파기도 한다.
시인에게는 몸 밖의 세상과 '몸' 이라는 내 안의 세상 두 곳 뿐이다.
그는 세상이 문제 아니라, 몸 덩어리 하나가 문제인 시인, 그리고 시였다.
폐쇄증, 밖으로 내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맘
세상에다 나를 내놓으면 까닥하게 말라버릴까 아예 몸 안에서 뭔가 해결해보갰다고 애를 쓰는데...
난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내 무게가 느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며 내 가슴은 왜 점점 퍽퍽해지는 것이지.
시인은 끊임없이 제 몸을 파고 들고 있었고. 내게도 이미 파놓은 구덩이가 있는 듯 있는 듯 익숙하단 말이지.
서점에서 시집을 사면서 한 자리에 앉아 두 번 읽고, 해설까지 다 읽고도
멍하게 낑낑거리며 들고 오게 된 시집이다.
시는 한 편이 아니라 뭉뚝한 시집 한 권이 한 편의 시인듯 잘라놓을 수도 떼 놓을 수도 없는 그런 시집이다. 내게 그렇다.
'왕가위의 2046' 싸운드트랙이 아픈 것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시집을 계산하고 나오면서 내가 또 한덩어리 쇳덩어리를 들고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쇳덩어리가 무겁고 짓눌려 아팠다.
언제쯤 이 몸을 빠져 나가 날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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