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모윤숙] 느티의 일월 중

by 발비(發飛) 2007. 2. 1.

진달래

 

모윤숙

 

 

   P형!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창문에 서서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안식에 방해되는 폭풍이나 혹은 소란한 파도의 여음이 그의 침실을 번거롭게 말아 달라고.

 

  그 사람은 인가에서 떨어져 먼 바다 한 가운데 조그맣게 솟은 섬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이름은 섬이랄까요? 아주 작은 동산같은 곳이랍니다. 작은 소나무들이 둘레를 짓고 봄이 되면 냉이, 민들레, 조개비같은 나물들이 살살 언덕배기에 수를 놓고 어여쁜 봄 꽃들이 미소를 띄고 그를 즐겁게 해준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나의 젊은 영혼이 저 월광 해안에서 노저어 가던 때-- 나는 4월의 밤 바다를 걷는 나그네였습니다. 그 날 밤-- 봄 하능렝 아득한 별들이 바다의 여행인인 나를 따라오고 황백색 반월이 물 위에 깨어져 바다는 은색으로 춤추었습니다. 동으로 서로 해원의 훙풍이 내 머리카락과 치맛귀를 날려 주는 한없이 유쾌한 밤이었습니다.

 

  내 앞에는 위대한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행복의 종소리가 수궁의 문전에서 나를 부르로ㅡ 인생은 즐겁다. 봄의 방향은 이처럼 사람의 정신을 높은 곳으로 취하게 할까?

 

  청춘아, 길어라 . 영원히......

  월광의 곡을 타고 자연과 함께 즐기자-- 이는 그날 밤 나의 즐거운 노래였습니다. 달이 가고 물이 가고 지향없이 나도 갔습니다. 이윽고 제 고향으로 내려가려는지 차차 바다 저편에 가까이 갑니다. 조금 후 가무스름한 섬 곁으로 내 배가 지나려 할 때 달 빛에 활짝 웃는 진달래 무리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의 즐거움은 컸습니다

  그 곳에는 해풍과 함께 곱게 핀 진달래가 나를 부루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 꺼림 없이 한 아름 꺽어 가지고 막 섬 기슭으로 돌아 배를 타려 할 때,

 

"누구신지 잠깐만 머물러 가시오."

 

하는 분명히 섬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평화와 그 공포로 맥을 잃고 섰지도 가지도 못할 즈음 벌써 그 음성의 주인이 내 곁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의 얼굴엔 기운찬 빛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한참 보더니,

 

"누구신지 모르나 밤중에 이 섬에 오신 까닭은?"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봄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모하는 여자입니다. 달빛에 보이는 진달래를 보고 주인없는 꽃인 줄 알고......"

내 말 끝은 그의 귀에 들려지지 않을 이만큼 작었습니다. 그 때 나는 작은 물살이 바다 위에서 찰싹거리는 소리만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섬에 핀 외로운 진달래이기에 아무도 모르는 바다 그늘에 저 혼자 피다 지는 진달래라고 외람히 손길을 대었삽더니."

 

 이렇게 입속으로 속살거리는 내 소리를 그는 다 들었을까요? 그는 나의 진달래 묶음을 간절히 바라보더니 눈가의 조용한 순간이 떠돈 후 반생동안 걸어 온 그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그는 이 땅에 속이 상하여 갈망의 비곡을 걷으려 시대와 싸운 사람, 그러나 동정할 사람, 이해할 사람은 그를 배반하고......

 

  대화의 상대도 없이 먼 섬으로 추방되었다 합니다.

 

  그는 아직도 토하지 못할 열정을 숨긴 채......

 

  이 작은 섬에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구요. 그 영혼은 백화와 같은 열정으로 타고 있었습니다. 내일을 위한 열혈의 지사에게 시기와 비난, 그리고 용서 없는 현실의 속박이 뭐가 그리 무서우리까? 그 이마의 피 흔적을 나는 달빛 아래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강철 같으나 포옹이 겸한 음성은 끝내 내게 울음을 자아내었습니다. 나의 조그마한 마음에선 순간순간마다 하이얀 불꽃이 굴러가고 있읍니다. 그는 큰 살림, 끝모를 광야의 나그네로서 눈물로 목을 축여 가며 달과 별과 함께 뛰어다닌 용사였습니다.

 

  나와 내 이웃을 위한 싸움......

 

  그 얼굴엔 피 흔적이 있지 않습니까? 가장 위대한 날은 미래에 있다고 그렇게 주장합니다. 근육의 운동이 없는 민중의 생활을 본받지 말라고 그를 바다를 향해, 그리고 나의 작은 영을 향해 외칩니다. 내손에는 여전히 진달래가 떨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진달래를 사랑하시오?"

 

  그는 다시 인정있는 음성으로 내 어깨를 가만히 노크하며 묻습니다.

 

  "네, 좋아합니다. 해풍에 핀 진달래는 어떨까 하고 꺾었습니다, 용서하소서."

 

  "아니요. 용서가 무슨 용서요. 나는 산으로 들로 다니던 유랑객의 몸이라 진달래 같은 꽃에 무슨 애착이 있으리까마는 어느 해 봄 어떤 지대를 넘으려 할 즈음 하도 배가 고파 산등성이에 핀 진달래를 있는 대로 다 뜯어먹은 일이 있지요. 말하자면 혁명가의 입에는 아무 인정이나 자비심 같은 것은 없는 것이지요. 그 후 진달래를 볼  때마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 이 섬에 온 후로는 일부로 진달래를 가꾸는 버릇이 생겼소. 이런 밤에 달빛 아래 핀 진달래는 나의 봄의 친구요, 사랑이요, 귀여운 자연이오, 미안하실 것은 없소. 당신 방에 갖다 가꾸시오.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의 일생을 비웃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공명의 의향은? 수많은 여성이 헛되이 살다 헛되이 무덤을 짓는 일을 기억하는지요?"

 

   그의 말은 침통하고 위엄이 있어서 이 마음의 구석구석을 파동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손에 든 진달래로 작은 화환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화환을 그의 머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앞 날의 그의 개선을 상상하면서, 그는 유쾌히 웃으며,

 

  "여성은 묘한 장난꾼이야" 하고 한참이나 나를 바라봅니다. 그 눈동자는 영원히 고독한 언덕에서 내리비치는 별빛같이 동경에 타고 있지 않습니까? 둘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바다 저편으로 달이 연홍색 둘레를 타고 떨어집니다. 별이 물 밑에 웃고 바람이 그의 얼굴을 거쳐 내 뺨을 스칩니다. 그 때 파도는 비곡의 음향을 몰아 들여 오고, 한 두 구름송이 물 위에 흰 꽃을 던졌습니다.

  

   P형! 

  그날 밤 그는 나의 항구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둘이 같이 배를 탔지요. 바람도 없고 파도 소리도 없는 밤에 둘이 배를 탔습니다.

 

   P형!  내 마음에 희망이 소리칠 때는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해풍에 둘린 진달래 섬, 거기 숨긴 내 마음의 무사!

  그가 아픔으로 병들어 누운 것을 보고는 아직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슬픔의 비밀이 무언지 모릅니다. 내 배는 폭풍으로 인하여 그가 있는 섬까지 지금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병실은 남쪽으로 있지요. 방에 걸린 칼, 갑옷, 활, 작은 초상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나는 지금 그의 곁에서 괴로운 신음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비밀을 엿들을 수는 없습니다. 기적의 나팔이 저 언덕에서 그를 부르는 날 그는 그 고요한 섬을 떠나겠지요?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무덤 속에 누웠을지도 몰라요.

 

 

  섬 속에 핀 진달래

  해안의 물결은 행복스러우리

  달 아래 피는 진달래

  섬의 바람은 밤새도록 노래 부르리

 

   P형! 봄입니다.

 

  진달래 섬을 사랑하는 이의 병실에 진달래 향기 퍼질 봄입니다. 진달래가 나를 부릅니다. 그러나 폭풍에 잠긴 내 눈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은 외로운 섬에 병들어 누웠건만. (1939년 4월)

 

 

 

어젠 아주 일찍 잠을 잤다.

세상과 완전한 단절을 꿈꾸며......

 

새벽 4시 30분이면 잠이 들기에 더 익숙한 시간, 창을 보았다.

캄캄한 창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난 어느 개화기의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캄캄한 세상에 홀로 뭔가 할 일이 있는 듯 눈을 말똥이는 여자 말이다.

풋 하고 웃어주고....

이 새벽에 맑은 정신엔 무얼하지 생각.

 

범우문고판 모윤숙의 느티의 일월이라는 수필집이 눈에 띈다.

설렁설렁 읽은 기억이 있기만 하다.

진달래가 눈에 띈다. 그냥 진달래가 아니라 '달빛 비친 진달래'

잎이 얇아 엷은 달빛도 스밀것이다.

달빛 스민 진달래.

한나무에 수십송이 진달래가 고루 빛을 받은 모양을 상상해본다.

그 아래 진달래 몇 송이를 딴 손.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오랜 정서. 이젠 낯설어진 정서. 그래서 그리운 정서. 이 새벽만큼......

 

글을 밀어두고.....풍경에만 젖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