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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by 발비(發飛) 2007. 3. 8.

 

불안의 정체

 

마네의 올랭피아가 프랑스의 한 갤러리에 걸렸을 때,

모두들 도전이라했다한다. 성적 사회적 도전.

 

도전이라고 받아들여질 때 그 때가 언제인가?

그 때는 불안할 때이며.

불안한 상대를 볼 때이다.

 

불안할 때.

보들레르와 동시대사람이며 교류한 사람이며 함께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에두아르 마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렇게 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들레르의 검은 연인 잔느 뒤발이 생각난다.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보들레르와 함께 있는 잔느 뒤발말이다.

 

불안한 영혼은 불안함 영혼을 구제한다.

 

불안한 상대를 볼 때

이 그림의 무엇이 도전이라고 여겨지는가? 그저 불안해 보인다.

왜? 완벽하지 않기때문이다.

비너스의 모습을 따온 저 모델이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너스의 우아한 미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너스의 얼짱 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여자들의 그림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여자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에 불안해 한다.

내가 실제 보는 상대가 검증되고 있다고나 할까?

착각속에 살고 싶었던 허영덩어리 인간들이 자신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여자들의 실체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불안하다. 완벽에 대한 환상이다.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나를 불안하게 한다.

숨겨야 할 것들은 뿌리가 된다.

뿌리가 되어 나를 서게 한다. 긴장하게 한다.

해체되는 순간 불안에 떤다.

그래서 인상파인 것이다. 불안의 인상을 가장 강열하게 심어주는 실체로서의 올랭피아.

 

그들 모두는 불안했다.

 

보들레르의 불안한 글을 보며 인간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듯

올랭피아를 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는

 

 

인상주의 그림의 시작이라고 불린다는 올랭피아를 들여다본다.

난 이 그림에서 나를 닮은 여자를 본다.

 

슬리퍼를 신은 여자.

침대 위에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여자.

수많은 신화를 형상화한 그림에서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 맨발이다.

맨발의 여자들은 옷을 모두 벗고 있어도 순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수많은 남자에 둘러싸여 있어도 맨발의 여자는 순진한,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침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에게는 다른 생각이 들게 한다.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여자.

어디론가 옮겨갈 것 같은 여자.

아니라면, 언제든 발딱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여자.

집을 옮기고 남자를 옮기고 지금의 자리가 붙박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여관방 잠을 자는 여자처럼... 곧 다른 방으로 옮겨가야 할 여자처럼.

 

난 이 그림의 보면서 불안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한다.

불안의 근원은 여자가 신은 슬리퍼를 통해서 내게 다가온다.

 

어제도 그제도 양말 신은 발로 침대에 누운 내가 이상했었다.

얼른 양말을 벗었다.

양말을 신고 침대에 누운 나의 두 발의 양말을 의식하는 순간,

난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까봐 양말을 벗어버린다.

눌러있어야 한다는 듯.

불안을 떨어버리려는 듯.

양말을 벗어던졌다.

 

그렇지만, 어제도 그제도 오후쯤이 되었을 때 나는 방안에서 신고 다니는 새 운동화하나를 꿰어 신었다.

남들과 나에게는 불안의 근원이지만 또 다른 난 저 여자처럼 신발을 신고 있으면 영혼이 안정된다.

신발을 신고 있는 타인은 불안해보이지만, 신발을 신은 나는 편안하다.

떠나려는 사람을 보는 것은 불안하지만, 내가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모두들 불안해한다.

떠나려는 듯한 사람을 본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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