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키스탄의 훈자에서 쓴 어느 날의 일기:2006.09.03
실패한 여행; 아직도 여행 중이다. 방콕도 가야하고 앙코르왓도 가야한다. 그런데 단언한다. 실패한 여행이라고······. 예정에 없었던 여행이었으며, 예정에 없었던 루트를 간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간다. 무엇을 본다. 어떻게 본다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그('그'라고 부르자)의 몫이었고, 난 그저 나를 떠난, 나를 그저 가만히 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를 따라 서쪽으로 끝까지 가려는 것마저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로 한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시간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장기여행자들의 공허한 눈빛을 만나고 나서이다. 나도 곧 그런 모습이며 어떡하나, 여행이 좋을 수도 있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나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어 머물게 되는 그런 여행이 될까. 그에게 채근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또 만들어놓은 길인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탈출한다.
석군- 그녀는 학창 시절 자신의 별명이 싫었단다. 분명히 그녀의 이름을 들었는데,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싫어했다는 별명만 기억이 난다. 석군은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를 정말 잘한다.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서 말하는 석군의 영어는 캐릭터화 되었다. 참 작다. 손과 발이 딱 나의 반 크기다. 집에 가고 싶단다. 무지 작은 여자가 집에 가고 싶다는데, 못 간단다. 그녀는 남자친구로부터 도망 나왔단다. 도저히 옆에서는 끊을 수 없는 관계라 했다. 이집트에서 직장생활을 끝내고 돌아가야 하는데도 한국과 이집트의 가운데인 중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남자친구인지, 석군의 집인지, 아님 홀로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석군은 세 가지 모두를 버리지 못해 자리는 남겨두고 몸만 멀리 피해있는 듯싶다. 석군!
2. 오늘 아침 석군에게서 온 메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해 여행의 추억을 가슴에 담고 일상에 이국의 향기를 더하는 새해 만드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훈자에서 시집을 전해드렸던 석미정 입니다.
주고 가신 오리털 침낭 덕분에 라카포시에서 길을 잃고도 얼어죽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불쌍한 생명을 구하는데 일조하셨으니 새해에는
행운 가득하실 겁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어떻게 돌아가야할지 아득할때마다 언니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언제든 가고 싶을때 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전 지금 카이로로 돌아와서 귀국 준비 중이예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하이데르 인 죽순이 석 ?? 드림
3. 그리고 다시 오늘
그 애(사실 애라고 하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이다)가 ??이었구나. 용케도 내 메일주소를 가지고 있었구나.
메일과 함께 사진 한 장이 함께 왔다.
훈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즈키'탔던 안에 있던 나를 찍었었구나. 커다란 배낭도 보인다.
그렇게 난 그 곳을 떠났었군.
손을 흔들며 여행을 마치려하고 있었군.
석군이 돌아오려나보다. 그래서 여행의 출발지였던 카이로에 갔구나.
성급히 그 애를 떠올리려고 그날의 일기를 찾았다. 난 그 애에게는 뭐라고 말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혼자서 일기장에는 뭐라고 말한 기억이 있어서......
메일을 읽으며, 몇 달 전 돌아온 나와 이제 돌아오려는 그 애.
여행 이라는 참 묘한 상황과 현실이라는 웃기는 상황이 교차한다.
꿈.
구름.
해.
모든 것이 아름다웠었던 것이 분명하다. 길에 떠다니는 사람구름조차도 아름다웠던 것이 분명하다.
메일을 급히 읽고 출근을 위해 탄 전철안!
자리다툼
흔들림.
졸음.
작은 신문.
이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길에서 생각한 이 곳은 아름다웠다. 그때 그리워하던 곳으로 난 돌아와있는 것이다. 새삼느낀다.
석군의 말처럼 일상에서도 이국의 향에 취해 그 향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
진정한 여행은 떠난다라던가
떠나있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뒤, 머물러있으면서도 마치 여행에서 느끼듯 충만한 감정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여행 중에 만났던 참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씩 돌아오려고 몸의 방향을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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