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방
이승훈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있다 빈 술병이 있고
피우다 버린 담배가 있고 의자가 있다
그녀의 방에는 의자가 두 개가 있다
그녀는 바지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겨울 오후 다시 바람이 분다 아니
겨울 오전 같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의 코가 있고
그녀의 커단 눈이 있고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있고 구름 한 장이 있다
그녀는 화장을 한다 그녀 뒤에는
한 남자가 있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녀는 말이 별로 없다 그녀의 머리칼도
말이 없다 그녀의 입술도 말이 없다
그녀의 커단 눈이 말한다 밖에 비가 와요?
그녀의 커단 눈은 그대로 활활 타는 불이다
그녀의 눈을 보면서 그는 사라진다
그는 그녀의 눈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의 눈 속으로 사라지는 그는
이제 그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사라진 그를 보고 그녀가 말한다 사라진
그가 의자에 앉아있다 아아 이건 꿈이로구나
그는 꿈 속을 헤매는구나 그녀의 방에는
커튼이 있고 탁자가 있고 의자가 있고
여긴 서울이다 사라진 그가 의자에 있고
그녀의 방이 있고 다시 비가 오려나보다
그녀는 내일 떠난다 가지마! 사라진 그가
소리친다 그녀의 방이 와르르 무너진다.
미루어보아
그녀의 방에는 커튼이 쳐져있고, 탁자가 있고, 의자가 두 개 있고, 거울도 있다.
......
그녀는 커다란 눈에 바지를 입었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 자신, 그녀의 그녀를 본다.
그녀가 본 그녀는 아무 것도 없다. 눈도 코도 머리칼도 말도 없다. 그녀의 뒤에 없는 그를 볼 뿐이다.
이건 교차한다.
혹 그녀가 거울 속에 비친 그녀 자신을 보게 되면, 그는 사라지고
그녀가 거울 속에 비친 그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순간이면 그는 그녀의 뒤에 있다.
......
그녀는 추운 겨울 날, 두꺼운 커튼이 쳐진 방안에서 술과 담배를 피우던 그, 술과 담배를 피우던 그녀 자신,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면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절정의 순간에 전환을 기다리고 있다.
전환을 기다린다기보다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면 어떤 식으로 전환은 다가온다.
말이 없던 그녀가 소리를 치자 나타난 현재,
현재의 그녀의 방은 이미 그녀의 방이 아니다.
오래도록 그녀가 살았던 방은 현재가 아니다.
그녀의 방이 무너지고 그녀의 현재의 방안에 앉은 그녀는 낯설다.
......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는 현재라는 시간을 살 수 있을까.
그녀의 방에서 살았던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지 않길 바란다.
아주 오래된 것은 저희들끼리 엉켜서 도무지 떨어지질 않으므로......
......
그녀의 방을 심란하게 들여다 본 우리 혹은 내가 그녀를 만난다면,
내가 보기에
지금 뭐랬어요? 무슨 일이세요? 무슨 문제 있어요? .......
하며 문을 닫을 것이다.
빨간색 루즈를 바른 그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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