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서
조지훈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직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곤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을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던져도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 내 영혼이 바람 속에 간다.
이 시를 읽으며 처음에는 바람? 바람이 부는 날 풀밭에 선 멋진 시인이 바람의 풍류에 젖었구나.
승무의 조지훈이라는 생각이 선점한 탓이다.
하얀 두루마기에 동그란 안경을 쓴 시인이 바람부는 언덕에 서서 시인으로서의 영혼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하는구나 생각들더라.
2연을 읽으며 새로운 풀잎? 조약돌을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약간 필이 바뀐다.
어디에든 바람은 불고 바람아래는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새로운 풀잎을 만난 시인은 조약돌을 던져 풀잎을 밟지 않고 땅을 딛지 않고 바람을 지나려 한다.
그러나... 안된다.
조약돌은 떨어지고 바람에 쓸린 풀잎은 어느새 시인의 몸에 닿았다.
그렇다면 그 바람이 그 바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또 들었었지.
3연, 풀밭에 쓰러진다.
그렇다. 바람이 사는 내내 불 것이라면 차라리 풀밭에 몸을 누인다.
풀들이 아래에 깔려 쓰러진다.
새로운 바람에 흔들리는 새로운 풀을 만나지 않고, 난 바람을 가르며 갈 일도 없다.
이미 땅에 떨어진 조약돌, 바람에 안착! 하다.
시인, 드디어 바람에 안착하다. 바람에 귀의하다. 죄값을 치르려한다.
바람난 죄, 그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몸은 풀밭에 누이고 영혼은 다시 바람속으로 갔다네.
이 시를 이리 읽어도 좋을까?
난 빽빽한 전철 안에서 이 시를 읽었다.
마침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이 시편 위로 사람의 발들이 빼곡한 것이다. 마치 풀들처럼 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람에 일렁이는 풀들같았다.
그리고 이 중 누군가는 바람에 흔들리듯
사랑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사랑을 하며 가기도 하며 빼곡한 풀모양의 발 들 중 사랑을 찾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철 안에서 바람이 부는 듯 느껴졌다.
누구나에게 부는 바람, 이는 바람이 세상 천지에 일렁이는 듯 싶었다.
그렇다면 이 시를 쓴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바람둥이를 상상한 것이다.
이런 상상은 내 안에 있는 나의 바람끼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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