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울, 집입니다.
4월 17일에 서울을 떠나 4월 26일에 서울로 돌아왔으니 딱 열흘간의 제주 여행이었습니다.
결코 오랜 시간이 아니었으나 오랜 시간이었던 열흘간을 마무리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제주일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열흘치 살림살이를 배낭에 담고 자전거 뒤에 묶고서 페달을 밟았습니다.
모슬포에서 송악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가져갔던 삼발이를 놓고 기념촬영을 ...
(그 삼발이는 다음날 다른 몇 몇 짐과 함께 서울로 보냈더랬습니다. 무거워서 말이죠)
아주 쌩쌩해 보이네요.
비장해 보이기도 하구요.
"맞어! 그땐 그랬어!"
첫날,
송악산. 삼방산. 용머리해안. 안덕계곡. 주상절리대. 아프리카 박물관....
월드컵경기장까지 열심히 달렸습니다.
자전거 도로가 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배가 아팠습니다.
달리는 중에도 배가 아팠습니다.
아마 차들이 달리는 사이를 헤집고 달리느라 극도로 긴장을 했었나봅니다.
급기야 전 다음날 아침 서귀포 병원에 입원했더랬지요.
그 이야긴 앞에 있으니...
병실 티비에서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동엽시인의 부인인 인병선씨가 "껍데기는 가라"를 낭독했습니다.
제주도 낯선 병원에 누워서 나의 나약함에 대해,
그리고 짧은 미래와 긴 미래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바로 그때, 내게 온 시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감히 이 시에 저의 허접한 감상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동엽시인의 부인의 육성으로 듣는 그 시는 제게 일종의 비장함을 심어주었습니다.
아프니까 그냥 포기해?
아님 무식하게 덤벼?
그저 껍데기를 벗고 그저 내 발길이 닿는대로 하고싶은데로 가기로 했습니다.
나의 껍데기나 가면을 내려두고 아니면 등에 지고
자전거도 내려두고 그저 몸하나로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자전거를 밀어두고 걸었습니다.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상달리 김영갑 갤러리앞에서 내렸습니다.
1.4킬로, 그 날 아침 병원에서 나왔으므로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습니다.
제주에 온 이유 중 하나는
김영갑 사진작가가 찍으신 오름 몇 군데라도 가서 호흡을 느끼고 싶어.
그 분이 맞으셨다는 바람 한 자락 가슴에 품고 싶어.
그런 맘의 근원이 된 김영갑갤러리를 향하는 길은 참 많이 설레었습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 설렘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시나, 그 곳은 아주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갤러리가 거의 문을 닫을 시간이었으므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갤러리 주인장님들밖에는요.
커피를 한 잔 주셨습니다.
갤러리 안의 좀은 캐캐한 냄새.. 아마 그 냄새는 갤러리안의 현무암이 품고 있은 듯!
그 냄새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 냄새의 한 자락에 작년까지 그 곳에 계셨던 김영갑작가님의 기운이 배어있는 듯하여
손을 헤집으면 그분의 기운이 닿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냄새를 느낀 이후 바라다 본 하늘은 냄새 이전의 하늘과는 좀 달랐습니다.
구름은 더욱 달랐습니다.
창 밖엔 하늘이 아주 파랗고, 구름은 바람에 좀 빠르게 움직였었지요.
그리고 갤러리 안의 사진 속의 구름은 더욱 빠르게 지금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나와 김영갑 갤러리 관장님이신 박훈일 사진작가님의 트럭을 얻어타고
용눈이 오름 입구에 잠시 ... 바람이 바람이 하도 불어 쑥대낭이 군데 군데 뽑혀있었습니다.
아직 초록이 선명한 쑥대낭이 바람에 쓰러져 용눈이오름 아래 쓰러져 있었습니다.
용눈이 오름 근처에 모텔에 묵었더랬습니다.
용눈이오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설레여서 모텔에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왔지요.
기억하시나요?
전국이 강풍으로 난리가 났던 지난주 어느날이었지요.
바람 많은 제주, 정말 ... 정말... 대단한 바람이었습니다.
저의 작은 디카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었던 바람의 느낌을 잡았던 날이었지요.
그 전에도 그 뒤에도 바람을 담은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용눈이 오름의 뒷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인데요.
굉장하지요.
우리가 기념촬영을 해왔던 유채밭- 그곳은 사진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근데 이 곳은 사진발이 아니라, 실제는 더 가관이지요.
정말 대단했던 바람과 노랑의 춤판이었습니다.
제주의 사진작가 몇 분의 작업을 옆에서 볼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이 용눈이 오름 아래여서 더욱 설레이게 했던...
정말 내가 제주 땅에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했던...
짧은 바지에 바람을 맞아 파랗게 얼었지만, 그 시간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던...
용눈이 오름 그 아래.
그리고 용눈이 오름을 올랐던 그 다음 시간까지
바람은 맞으면 맞을수록 행복은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자구내포구라는 곳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이의 알리바이가 뜨네요.
그 사이 이틀동안에 전 자동차를 이용했지요. 그리고 배를 탔지요.
우도를 다녔고, 가파도를 다녔고, 마라도에서 하루를 묵었고, 비양도는 다음날 갔었고....
그 이야기는 앞에서....
수월봉에서 자구내포구로 가는 해안도로. 이 곳은 차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걸어서 걸어서 그 곳을 지나갔습니다.
곧 일몰시간입니다.
어느 지점을 지나는데, 한 방향을 향해 온 몸을 돌리고 도열해있는 갈매기들을 만났습니다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 같이 기다리는 거야'
그리고 한 시간 30분동안이나 갈매기 뒤에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일몰을 기다리는 갈매기들.
그 뒤에서 또 일몰을 기다리는 나.
그 곳의 일몰은 다섯시방향까지는 찬란하더니, 그 뒤 스르륵 사라졌습니다.
그러고보니 갈매기도 스르륵!
그 날 바다에 빠지는 해는 보지 못했지만, 하염없이 일몰을 기다리던 갈매기
그리고 더는 일몰이 없음을 예상하고 훌훌 떠나버리는 갈매기들
그 시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덜덜 떨며 갈매기들과 함께 기다리던 1시간 30분, 바다의 물결이 이뻤습니다.
걷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아이들의 웃음, 그리고 배웅!
비양도를 나와 한림항부터 애월까지 걸었습니다.
걸은 시간으로는 3시간 정도이지만, 걷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그 곳을 돌았다면,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그 곳을 돌았다면......
전 걸었습니다,
천천히 걷는 동안에는 아이들도 만나고, 할아방과 할망도 만나고,
걸으면 세상이 확대되어 보입니다.
첨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계보조사도 하고
알리바이 조사도 하고
호적조사도 하고.
아이들 얼굴도 무지 많이 찍어서 디카액정으로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리 따뜻이 저를 배웅했습니다.
몇 분 머무른 시간에 저에게 저리 행복한 '바이바이'를 소리쳐 준 아이들, 고마웠습니다.
등이 뜨끈뜨근 했습니다.
이번 제주 여행의 테마중의 하나는 길입니다.
차로 달리는 길
자전거로 달리는 길
걸어서 가는 길
길들을 가면서 무엇을 타고 가느냐에 따라 길은 그 모습을 달리 했습니다.
최고 효용이 다르지요.
차로 달릴 때는 오르막 내리막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만 휙 휙 지나가는 경치들이 자판기 커피 같았습니다. 간단명료하면서 갈증해소
자전거로 달리는 길
이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구분이 아주 선명합니다.
오르막에서의 근육이 뻣뻣해지는 수고로움
내리막에서 몸은 어떤 운동도 하지 않고 완전 정지된 채 세상이 나를 지나가는 시원함
걸어서 가는 길
오르막도 내리막도 그저 길,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보여주는 풍경들,
지표면에서 발이 머무르는 시간이 느린만큼 그 곳의 기운을 받고서야 한 걸음을 떼는..
좋고 나쁨이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 길을 걷느냐에 따라
길은 나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대했습니다.
나도 무엇을 타고 가느냐에 따라 길을 대하는 모습이 달랐습니다.
무엇을 타고 가느냐?
무엇을 하려 하느냐?
저녁비행기로 제주여행을 마치기로 했습니다.
마지막날 제주에서 제가 치뤄야할 통과의례는 한라산 등반입니다.
시외버스터미널 점포에 배낭을 맡기고 몸하나 달랑 성판악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성판악에 내리니, 한라산을 등반하러 가는 사람은 달랑 둘!
대학생인 듯한 청년 하나가 우비를 준비합니다.
저도 우비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같이 산을 오르기로 .... 김모산입니다.
그는 다음달에 군대를 가려고 한답니다.
입대하기전에 한라산에서 트래이닝중이랍니다.
한번도 쉬지 않고 백록담 오르기,
저도 덩달아 그 훈련을 같이 ... 백록담까지 세시간만에 올랐습니다.
비가 오고 운무는 가득하고, 바람은 불고, 손은 완전히 얼어 감각이 없고,
백록담은 바람으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바람안에 서 있는 동안 모산이와 전 친해졌습니다.
고통(?) 중에 함께 한 사람은 할 이야기가 많은 법이지요.
하산길에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말에 바로 필 받았습니다.
두번 보았다기에 전 세번을 보았다고...
남미를 꿈꾸게 된 계기 중의 하나라고...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참 재미난 모산이었습니다.
제주 여행 중 마지막 만난 모산이는 제 여행의 피날레를 멋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산길도 한번도 쉬지 않고 쭉 내려왔습니다.
한라산을 6시간만에 ... 그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라산과 백록담에는 얼음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차들이 많습니다.
공항리무진 버스에서 내다본 서울의 거리가 낯설기도, 편안하기도 했습니다.
차들 사이로 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저의 모습과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저의 모습
그 둘의 모습이 종이 한 장 사이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더욱 아름다워보인다고?
더욱 가까워보인다고?
참 희한한 일입니다.
밤 열시가 되어서야 집 근처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지만 친구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여행을 떠나던 날 이 친구의 애절한 배웅을 받으면서 떠났더랬습니다.
그의 마중을 받고 싶었습니다.
잘 다녀왔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내 몸에서 제주의 바람냄새가 사라지기 전에 친구에게 그 기운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 잘 했지?"
이중섭미술관에서 산 '물고기와 아이' 그림이 새겨진 핸드폰고리 하나에 너무 기뻐하는 친구.
그 친구가 저를 보고 잘 했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전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도의 산호해수욕장에 찍은 저의 발사진입니다.
이번에도 제 발은 엄청 고생을 했지요
하지만 산호해수욕장 맑은 물에 참 이쁘게 담겨져 있는 저 발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제 발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을 남깁니다.
자충우돌 제주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제주여행 협찬해주신 분들-
제 블로그 친구이자 제주민이신 미니모님-이번 제주여행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진혁재 어린이-저의 귀가를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나 이제 집에 왔단다. 비행기타고'
이창수 모슬포주임-몇 개 오름, 갈치국과 자리물회 맛났습니다
학구적으로 제주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김갑연할머니 -서귀포 열린병원 제 옆 침대 할머니, 챙겨주신 것들 맛있었습니다.
이선미-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제주로 피난온 웹디자이너, 사진기로 장난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찜찔방 할망 할아방-찜질방 주인이라기보다 따뜻한 외가식구였습니다
박훈일 김영갑갤러리 관장님-그저 스쳐가는 사람일 수도 있었는데, 용눈이 오름을 처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서귀포에서 만난 트럭아저씨-자전거를 트럭에 실어서 위미까지 태워주셨습니다.
원주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길로 가시면서 제주의 비경을 ... 고향이 대구라는데,
상명리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망들-저에게 혼자 왔냐고? 정말 혼자 왔냐고 10번은 물으셨던...
한림의 구멍가게 아주머니-온갖 불량식품(?)을 맛보며 버스를 기다리게 허락해주셨지요.
마라도 식당 김희주사장님-텅빈 마라도에서 단합대회하시는 식당주인님들,
제주삼겹살, 한라소주 잘 먹었습니다.
비양분교 고병훈선생님- 비양도에서 좀 심심한 시간, 커피 잘 마셨고, 제주강의 잘 들었습니다.
애월읍 삼총사 윤성철 외- 그들 덕분에 간만에 흙장난 했습니다. 이쁘게 잘 자라길.....
김모산- 한라산동지, 그가 계획하는 규격에 잘 맞는 인간이 되길.
그리고
길을 물었을 때 길을 가르쳐주신 수많은 분들,
참 많은 분들이 생각납니다.
여행은 길 위에 있고, 길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은 저를 채웁니다.
여기는 서울 저의 집입니다!
'見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구내포구]갈매기들의 일몰 (0) | 2006.04.28 |
---|---|
[가파도]보리밭 그리고 바람 (0) | 2006.04.28 |
여기는 제주시 (0) | 2006.04.25 |
지금은 한림 (0) | 2006.04.25 |
지금은 마라도 (0) | 2006.04.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