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에 소재한 팔영산. 60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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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수영봉, 2봉/성주봉, 3봉/생황봉, 4봉/사자봉, 5봉/오로봉, 6봉/두류봉, 7봉/칠성봉, 8봉/적취봉) 등 모두 8개의 봉우리를 즐길 수 있다.
밤새 버스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11시에 서울을 출발, 새벽 6시에 도착했다.
모두들 간단히 아침을 챙겨먹는다.
오늘 나의 섭생은 간단 버전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다.
가벼움을 느끼고파 가는 길,
제주 하이킹을 가지 전에 새로 산 신발을 점검하고 체력을 점검해 보기 위한 전지훈련이라고나 할까?
최소한의 기분 좋은 섭생을 체크해야 한다.
그래서 준비한 것, 삼각김밥 세 개. 괜찮은 생각.
하지만 출발 전에는 먹지 않는다. 이유. 배고프지 않다.
졸리움을 뒤로 하며 천천히 걷는다.
등산화가 아닌 가벼운 운동화로 모처럼 걷는 산길... 불안하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다.
어둠속으로 걸어가는 길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산중턱까지는 그저 어둠 뿐이었다.
멀리서 동이 터오르기 시작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창 이었을 진달래들의 잎사귀들이 움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달래는 나무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발 아래 흩어져 꽃길이 되어있었다.
사뿐히 즈려 밝고 산을 오른다.
목련이 아닌게 다행이다.
진물이라도 흐르는 꽃잎이라면 아마 걸을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발갛게 떨어진 꽃길을 걸으니, 어쩌면 꽃이 필 때보다 더 황홀한 기분이다.
꽃을 밟는다는 것, 짜릿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를 밟은 이의 쾌감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이건 농담이다.)
하지만 꽃잎을 밟고 지나는 길이 짜릿함은 속일 수 없다.
고흥반도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중턱이상이 되자 어디로 머리를 돌리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섬을 볼 수 있었다.
제 1봉에 올라섰다.
이 곳은 바위산이다. 바위산에는 당연 루프가 있다. 팔영산의 모든 루프는 철근이었다.
차가움, 미끄러움, 장갑을 준비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개인적으로 돌산, 암벽타는 산을 좋아한다.
쾌감이 있다.
그리고 아슬함이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산에 집중할 수 있다.
매달리는 순간 어디에서 볼 수 없었던 나에 대한 만족감이 있다.
마술이나 부린 듯 루프를 가뿐히 타고 올라선 제1봉에서 첫번째 일출 지점을 찍었다.
그 다음, 8봉까지 있지만, 산이 크지 않은 탓에 금방 다음 봉으로 넘어간다.
다음 봉으로 넘어갈 때마다. 루프타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봉우리에 올라설 때마다 처음 점 찍어둔 지점을 다시 본다.
사실 봉우리를 건넜지만 멀리 보이는 그 점은 움직이지 않는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움직이든 안 움직이든 해가 뜨던 그 지점도 그대로이고 산도 그대로 이다.
그저 움직이는 것은 나일뿐이다.
이왕 나만 움직일 것이라면, 좀 더 탄력있게,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면
기분좋게 마구 움직이기로 한다.
휙 휙 날아다닌다.
오늘은 일행이 없다.
오직 혼자만이 한 산행이다.
간만에 혼자 한 산행이 가볍다.
그저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쉰다.
3봉을 넘은 고개에서 배가 무지 고프다. 순간 어질거렸다.
삼각김밥 참지마요네즈 맛을 골랐다. 한 개를 먹고 물 한 모금,,, 시장기가 가신다.
다시 봉우리를 넘는다.
여유가 좀 생긴다.
그러고 보니 꽃 진 자리에 잎이 돋고 있었다.
잎들은 가시를 미리 내 보내고사서야 연두색 잎이 배시시 얼굴을 내민다.
아무도 겁내지 않을 가시지만, 잎들은 그것도 방어라고 가시를 미리 보내는 것이다.
작은 잎들도 저 살길을 찾고 있었다.
잎이 단단해질 즈음이면 지금은 뾰족한 가시는 잎의 뒷쪽으로 몸을 숨기고 가시를 숨길 것이다.
아직은 뾰족히 날을 세워야 한단다.
여리디 여린 잎을 아직은 지켜줘야 할 때란다.
아침 7시정도,
해는 솟았다. 구름에 가려 동그란 해는 볼 수 없었지만, 가늠한다.
해가 솟아올랐음을 알 수 있다.
팔영산 네번째 봉우리에 올랐을 때, 바다는 붉게 물들었고, 나무가지는 해를 향해 뻗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해를 향해 서 있다.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해를 향해 몸을 돌린다.
얼마나 떠 올랐을까,
내가 그를 찾듯이 팔영산 앞 바다에 오른 해도 나에게 눈길 한 번은 주지 않을까 싶어
자꾸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무 가지들과 나란히 서서 해를 향하고 있다.
나도 나무처럼 당당히 해를 보고 서 있고 싶다.
그렇게 해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어도 그 곳에 내 자리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해를 보고 있는 나무, 나무 뒤에 서 있는 나!
팔영산 바위 봉우리에 서서 해를 보았다.
내 뒤로 해에 비친 그림자가 길다. 거치른 바위 결위에 내가 누워 쉬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난 서 있고, 또 하나의 난 누워서 쉬고 있고, 다음 봉우리로 넘어간다.
내가 지난 온 길이다.
멀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내 뒤를 따라오던 어떤 등산맨, 나에게 말을 던진다.
"유격훈련 받으세요?"
"......"
바위산을 쉬지 않고 오르는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한다.
내가 그렇긴 하지.
그렇게 보이긴 하겠지.
아무말하지 않고 루프하나를 붙잡고
뒤로 몸을 돌려 바위를 마주하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려간다.
발을 디딜 돌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몇 번쯤은 발로 찍어보아야 한다. 혹 돌이 부스러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루프도 발을 디딜 자리고 정해지면, 두 발을 번갈아 가며 가볍게 발을 디뎌야 한다.
오래 머무르면 발에 힘이 들어가 미끄러진다.
자리가 정해지면 손과 발을 재빨리 움직이며 리듬을 타며 내려온다.
숨도 쉬지 않고 내려온다.
쭉 하고 미끄러지듯, 몸에 리듬을 타고 내려온 뒤 내려온 바위길을 보면,
'저 길을 내가?' 싶다. 장하다.... 치타....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내가 이런 산을 탈 줄 몰랐지만, 잘 한다.
팔영산 도립공원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돌산은 나를 흥분시킨다.
제7봉 오르는 철근 난간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저게 뭐야? 싶다. 이미 앞서 간 사람들이 봉우리 위로 보인다.
나도 저 길을 걸을 것이다.
험하고 가파르게 보인다.
하지만, 경험상 안다. 보이는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것,
멀리서 본다는 것은 발 밑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것이 내 발아래 놓일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단 그 곳에 가서 내가 디딜만한 길인지 아님 생각보다 어려운 길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방법은 여러가지.
쉬운 길이면 가면 되고
어려운 길이면 무엇때문에 어려운 일인지
극복 가능한 일인지 가보면 알게 된다.
처음 저 곳을 보면 헉! 하지만, 그 아래 그 길을 걸으면서 내가 헉! 했던 기억조차 잊어버렸다.
저 길에서 해를 마주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남았으며,
저 곳에서 본 나의 뒤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있었으며,
저 봉우리를 넘자 미리 자리한 등산객들이 수두룩 앉아 시장기를 다스리고 있었다.
오르락 내리락 한 팔영산,
전라도 바닷가 산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위, 산, 바다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난 사방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간만에 재미있는 산을 조용히 잘 올라갔다 왔다.
'승가사'로 내려오는 조용한 숲길 내내 새봄 피어나는 나뭇잎들과 꽃들을 사진에 담았다.
팔영산아래로 내려오자,
앞으로는 갈대밭이 있고, 옆으로는 대밭이 있었다.
대밭사이로 건너 들어갔다.
댓잎이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나무에 손을 대니 차갑다.
초록이 짙은 대나무일수록 더욱 차갑다.
사람은 홍조를 띠고 따뜻한 체온을 가져야 따뜻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인데,
대나무는 그 반대이다.
뜨거워지면 생명을 다하는 것이다.
난 대숲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시원한 초록 아래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틈없이 보이던 대숲이 그 안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 줄기 굵다란 빛이 들어온다.
초록이 더욱 짙어질 것이다.
대나무는 더욱 차가워 질 것이다.
다 내려왔다.
'승가사'라는 작은 절마당에 동백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오늘 산행의 마무리는 동백나무 빨간 그림자이다.
꽃째 떨어지는 동백을 애닯아 했었는데, 승가사에서 본 동백은 꽃째 떨어져서 아름다워 보였다.
빨간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제자리를 제 스스로 자리펴 꽃방석을 만들어 두었다.
내 아래, 나에게서 떨어진 무엇이 , 이미 내 것이 아닌 무엇이 내 아래 어느 곳에서
빨간 방석이 되어 나를 빛내고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도 열흘정도의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리고 오랜 꿈인 페루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 첫 발을 팔영산으로 잡았고, 빨간 꽃방석을 보았다.
사라진 시간들이,
아니 지내온 시간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빨갛게 나를 받치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다시 야심차게 여행을 준비한다.
바비킴의 노래가 잘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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