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둥이다. 이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시인 한하운.
내가 처음으로 가슴에 얹고 잠이 든 시집은 한하운의 '보리피리'이다.
사춘기도 지나고 대학교도 졸업한 어느날 우연히 잡은 '보리피리'는 나를 다시 사춘기 어느 날로
되돌려 놓았었다.
스물 몇 살을 참 뻐근하게 아프게 만들었던 시집. 그.
질풍노도라는 사춘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났던 나를 어쩌면 지각이지만 통과의례는 치르게 한 시집. 그.
그를 보고 싶어 떠났던 길이다.
전라도길
-소록도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그랬다.
고흥반도에 들어서자 차창으로 보이는 붉은 흙이 가슴을 뻑뻑하게 만들었다.
흙은 아직도 붉었다.
아스팔트와 야트막한 언덕의 초록들 사이로 붉게 삐어져 나와있었다.
붉은 길.... 하필 소록도로 향하는 길은 왜 그리고 붉었을까?
아마 아마 그렇지 않았을거야.
그들이 지난 다음 저 길은 저리 붉어졌을거야.
내가 버스에서 내린다 한들, 자 흙을 만질 순 없을 것이다 싶었다.
버스에서 내린다 한들, 저 붉은 흙을 밟을 순 없을 것이다 싶었다.
녹동항에서 본 소록도.
작은 어선들이 항에 묶여있었고, 회집들이 난전으로 바다를 휘두르고 있다.
육지와 참 멀거라고 생각했던 소록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가까웠다.
완만하게 보이는 푸른 섬이다.
섬에 바위 몇 개라도 보였으면 .... 비집고 나온 가시 돋힌 나무 꼭대기라도 보였으면 ....
부드럽게 생긴 소록도를 보는 순간, 벌써 반전이다.
나의 소록도 기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반전을 맞았다.
이른 반전은 조루증 환자처럼 애닯은 맘만 남고, 온 몸에 힘은 쫙 빠져버렸다.
다시 절정을 맞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소록도의 완만한 초록을 보는 순간, 난 ...... 조루증 환자가 되어버렸다.
나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시인에게 문둥이가 업이라면, 소록도 저 섬도 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업은 전생을 담보로 잡힌 것이다.
업은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업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고, 업을 아는 순간 탕감에 들어간 것이다.
업을 느끼는 순간, 현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의지가 생긴다. 미룰 수 없는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통을 이길 힘이 생긴다.
오직 다음 생을 위하여, 오직 다음 생을 위하여,
부채없는 다음 생의 홀가분함을 위하여.
업을 하는 순간, 희망을 꿈꾸게 된다. '다음 생에는....' 하고 기대한다.
멀리 보이는 방파제를 보는 순간, 잊었던 소설 한 편
방파제를 쌓던 문둥이들, 무너져내린 돌들,
뭐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에 새로 부임해 온 원장이 문둥이들에게 새 삶을 주려 하지만 문둥이들은 안 믿는다.
세상에 배신만 당해온
문둥이들이 애당초 조원장의 계획을 믿지 않는 이유는 정상인인 조원장의 천국건설은 잘 되어봤자 정상인이다.
소록도가 아무리 천국이 된 들, 그것은 '당신들의 천국'일뿐 문둥이들의 '우리들의 천국'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천국은 그들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천국'이라는 감옥일 뿐이다.
그런 이야기였었다. 분리였다.
지금 끊어진 방파제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낮은 높이의 다리와 높은 다리, 배들이 지나 갈 수 있도록 높이가 조절되는 그런 다리. 이름이 뭐지?
다리가 놓아지고 있었다.
곧 소록도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배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널것이다.
'당신들의 천국'도 '우리들의 천국'도 천국이 없어지는 것이다.
비창
차이코프스티의 <비창>아
이 격리된 癩療養所(나요양소)에
국경도 없이 차별도 없이
또 세균학도 없이
뇌파에 흐흐 느끼어온다
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수없이
떠내려온 운명의 하류에서
불시 나는 나의 현실을 차버린다
두 조각 세 조각 산산이 깨어진다
지금
모든 것이 깨어졌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이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바다가 시인 한하운의 '비창'을 연주한다.
물결이 일렁인다.
도양해운 소속의 배가 빤히 보이는 소록도를 향해 5분,
소록도 검문소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야트막하다.
물결이 참 많이 반짝인다.
난 배의 이층 난간에 서 있다가, 아래로 내려왔다.
배에서 일하시는 분께 금지선이 그어진 곳까지만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최대한 가까이 몸을 내밀어보았다.
그건 무슨 맘에서?
그저 소록도라는 문둥병 환자들의 섬이 신기해서라기보다 시인 한하운의 숨결이 사라지기 전에 느껴보고 싶었서였다.
5.60년전 그가 나처럼 이 바다를 건넜을 때 이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시인은 분명 소록도를 정면으로 보았을 것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배의 난간에 서서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자신을 다짐했다.
난 그의 말을 따라한다.
나도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니 문둥이 올시다. 생각해보니, 나도 문둥이 올시다.
온 몸에 콩알이 돋고 있습니다.
나에게서도 너에게서도 모두에게서 콩알이 돋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과 오현스님과의 만남을 이야기 한 책 '열흘간의 만남'에 보면 오현스님의 일화가 나온다.
오현스님은 젊은 한 때 탁발을 다녔다고 한다.
자신이 한 집 문앞에서 열심히 끊임없이 경을 외웠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더란다.
그런데, 문둥이 하나가 문앞에 서자 주인여자가 나와서 그에게 한 사발의 밥을 주더란다.
그때 오현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단다.
'부처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문둥병이구나.'
그리고 문둥이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같이 가서 겨울을 났단다.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안의 문둥이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진정 문둥이라고 인정한다면, 한 사발의 밥을 먹는 것이 아무런 일도 아닐 것이다.
시인 한하운은 그러나 문둥이가 아니라고 했다.
문둥이가 아니라고 했다.
난 지금 내가 문둥이라고 한다.
세상은 소록도에서 육지를 보느냐? 혹은 육지에서 소록도를 보느냐에 달린 것이다.
문둥이도......
난 잠시 난간에 서서, 소록도에 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빙빙 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은 전체가 병원이다.
경미한 환자들이 가정을 이뤄사는 작은 집, 그리고 성당, 교회, 절, 신사까지... 섬의 입구에 있다.
벗나무가 아주 흐드러진 길을 걸었다.
발아래로 하얀 민들레가 피어 있는 길을 걸었다.
오른 편으로는 파도가 찰랑거리는 모래사장을 낀 바닷가가 있었다.
왼 편으로는 수돗물이 방울 떨어지는 양동이가 뒷 켠에 놓인 붉은 벽돌의 일층집들이
똑같이 줄지어 있었다.
그 집에는 하얀 개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 마당에는 겨잣빛 승용차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담을 따라 걸린 빨랫줄에는 한 가족의 옷들이 나란히 널려있었다.
그 집에서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내가 따라가는 아스팔트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햇빛가리개 모자를 쓴 관광객들이
벚꽃나무 가지를 흔들어 꽃잎눈을 만들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양 걸음걸이 몸맵시하며 틀림없는 저......누구라 할까......
어쩌면 얇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이 아스팔트길을 걸으면,
신사가 나오고,
섬에서 나가는 문둥병 환자들에게 정관수술을 시켰다는 병동을 지나고,
일제치하에서 환자들을 몰모트로 사용했다는 병동이 나오고,
화장터가 나오고...
그런 곳들이 쭉 길을 따라 나온다는데, 난 이즈음에서 이 길을 그만두려고 맘 먹었다.
성당이 보였다.
성당마당 앞에 서 계시는 성모상앞에 어떤 관광객 한 명이
성모상 발 밑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치~ 하며 사진 한 방을 찍고 있었다.
성당 마당은 스무 걸음 정도를 지나면 성당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무 문을 삐걱하고 열자,
정면 십자고상이 보라색 포장으로 덮혀있었다.
성체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면, 사순시기가 지나고 부활시기가 된 모양이다.
수녀님 한 분이 제단을 장식할 꽃꽂이를 하고 계셨다.
제대 위의 십자고상은 유난히 팔이 아래로 쳐져 있었다.
난 뒷자리에 앉았다.
몇 년만에 성당에 앉아보는가 . 그 자리가 낯설다.
모자를 벗고 썬그라스를 벗고, 두 손을 모았다.
옛날 어느 연세드신 분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다.
"예수님은 봉헌 중에 고통의 봉헌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불현듯 떠오른 그 분의 말씀을 생각하며, 난 기도를 했다.
"이 곳에 다 드리고 가겠습니다. 내 안에 고통이나 갈등이 있다면 감옥의 섬, 소록도에 다 내려놓겠습니다. 여기 그저 봉헌하고 가겠습니다. 이제 나의 고통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입니다. 난 이제 모르는 일입니다. 봉헌하였습니다."
그 말만 몇 번을 하자......
주루룩~ 눈물이 났다.
고통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었나? 주루룩~ 주루룩~
마치 영수증을 받은 듯한 맘이었다.
달게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성당문을 나왔다.
햇살은 무지 밝았고, 여전히 아스팔트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人環(인환)의 거리
人間事(인간사) 그리워
피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畿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피-리 닐니리.
그만 돌고, 뒤돌아 오는 길에 보리피리 불며 피-리 닐니리.
앞으로 가는 길에 보리피리 불며 피-리 닐니리.
보리피리 소리 대신 얇은 파도소리가 들리고
보리피리 소리 대신 가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보리피리 소리 대신 피-ㄹ 닐리리, 내 숨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걸음으로 몇 미터를 뛰었다.
팔딱 팔딱 심장이 뛰고 있었고, 다리는 가벼워졌다.
가슴에 얹어두고 잠을 잤던 첫 시집 '보리피리'를 가슴에 장착 시켰다.
한하운 시인을 가슴이 뽀개지는 시를 썼던 시인으로 기억했던 오랜 시간 대신,
내 가슴에 다른 한 분으로 남았다.
보리피리 불며 피-리 닐니리.
얼굴에 콩알 잔뜩 묻히고 햇살 아래 보리피리 불고 있는 한 남정네.
돌아오는 배는 눈깜짝할 사이에 나를 녹동항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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