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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장정일]아파트 묘지

by 발비(發飛) 2006. 4. 6.

아파트 묘지

 

장정일

 

홀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 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그녀의 다리에는 피곤함이나 짜증 전혀 없고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 인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오래된 이야기지.

인사동에서 종로 3가 전철역 방향으로 가고 있었었지.

인사동에서부터 내 앞을 내내 걷는 있는 한 덩치 큰 백인.

나의 몇 발자국 앞에서 걸었지

내 앞을 걷고 있으니까.. 내 눈은 그를 볼 수 밖에 없더라구

 

난 커다란 유리컵이 그를 덮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수많은 사람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지만.

분명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텐데

내가 본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햇살아래 걷더란 말이지.

 

'배가 고프구나.'

생각이 들더라.

왜?

그는 길 옆에 포장마차와 롯데리아를 번갈라 보면서 걷고 있었거든.

그가 음식들을 보는 눈은 분명 배고픔이었지.

하지만 그는 음식을 먹지 않았어.

종로 3가 전철역으로 들어가더라.

나도 따라들어갔지.

3호선을 따고 어디까지인지 모를 역까지 한참을 갔지.

난 그 방향이 아니었지.

그를 보고 있었어.

그에게 여전히 투명유리컵이 씌워져 있었고, 전철 안에서 들리는 어떤 소리도 그와는 상관없는 기계음으로만 들리는 듯 했지.

그가 내리더라.

나도 내렸다.

난 그에게 다가갔지.

혹시 배가 고프냐고 물어보았지.

그는 너무 놀래는 듯 나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물었지.

난 인사동에서부터 그를 따라왔다고 말했지.

그는 더욱 놀랬지.

난 그가 배고파 보였고,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참는 것 같다고 말했지.

그는 고맙다고 하더군.

난 어설픈 영어로 이렇게 황당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같이 밥을 먹어주고 싶다고 말했지.

그는 자신은 어제 처음 한국에 왔다고 말했고,

그럼 잠시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을 하자고 했지.

난 아니라고...

배고픈 것이 아니라면,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지.

(사실 이렇게 유창한 영어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난 그렇게 설명했지)

그와 악수를 하고 ... 고맙다고 말했고.

난 참 민망하게 뒤를 돌아서면서 헛웃음을 웃었지.

'미친 것이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리컵에 들어앉은 듯한 모습을 보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그 때는...

지금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 난 아무렇지도 않을테지.

 

오래전 그 일이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이 났다.

 

우리 모두는 같은 공동묘지에 묻혀도 될만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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