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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정병근]유리의 기술

by 발비(發飛) 2006. 3. 30.

유리의 技術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는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 곳에 갈 수 없다니!

이 쪽과 저 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사이에

통증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럴것이다.

 

방금 두 분은 안동으로 내려가셨다.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는 날에

두 분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베란다유리에 비치는 햇빛이 눈부시다.

안에서 보는 유리는 세상을 들이는 것이지만, 밖에서 보는 유리는 눈을 멀게 한다.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유리의 기술이다.

 

두분이 내려가셨다.

내일은 울엄마생일.

생신이니까 그날 하나밖에 없는 딸과 보내자고 했지만서도 울아버지 엄마 생일 혼자서 열심히 즐겁게 해드릴거란다.

그렇지!

자식이 뭐라고.,서방님이 당신 생일 즐거이 보내주시겠다는데.... 더 할 말 없음이다.

늦은 밤

작은 케익하나를 샀다.

엄마의 연세가 어떻든 이제부터는 무조건 초를 다섯개만 사기로 했다.

내 맘대로 이제 아버지의 생신때도 그럴 것이다. 내 맘대로 이제 두 분은 항상 초 다섯개만이다.

알코올이란 알코올은 다 비운 관계로 포도주 쬐금 남은 것을 셋이서 사이좋게 나누고

건배를 했다.

잘 살아보세... 그럼서

 

아버지 간만에 알코올기가 들어가시니 좋다시며 한 모금에 꿀떡하셨다.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달다시면서

엄마도 꿀꺽.. 나도 꿀꺽

유리잔 사이로 울아버지 울엄마의 얼굴이 쏙 들어간다.

유리의 기술이다.

 

어디에 울엄마 울아버지를 그리 쏙 담을라나... 동그란 유리잔에 쏙 들어앉은 두 얼굴이 반짝인다.

두 사람

한 사람씩 각각 다른 곳에서 태어나 한 곳에 자리하고 앉아 각각의 잔을 들었다.

잔안에 쏙 들어앉은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았다.

유리의 기술이다.

 

두 사람

그 얼굴이 내 눈안에 박혔다. 유리구슬이 되어 내 눈에 박혔다.

동글란 유리구슬속에 들어앉은 두 얼굴이다.

그 안에 들어앉으신 분이야 내가 보이겠지.

두 분의 동그란 얼굴이 들어앉은 유리잔이 반짝일때마다 두 분의 얼굴이 흐리다.

눈이 부시며 눈코입이 보이지 않는다.

"너 왜 쳐다보냐?"

"안 보여서요. 제가 잘 보이세요?"

유리의 기술이다.

 

두 분은 나를 반으로 잘라놓은 듯 유리잔안에서 나를 보시고

난 두 분을 그저 눈부신 빛으로만 본다.

두 분의 가슴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길이 없다.

유리잔안에 두 분이 들어앉으신 이유가 될 것이다.

쨍하니 햇빛이 비치면 비칠수록 유리잔안의 두 분은 내가 더 보일테고

쨍하니 햇빛이 비치면 비칠수록 유리잔 안의 두 분을 난 볼 수 없을테고

유리의 기술이다.

 

시인이 일러 준 유리의 기술...그렇군요. 유리의 기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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