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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대로 小說

[최인훈] 광장 서문

by 발비(發飛) 2006. 3. 13.

-[광장].서문-

 

최인훈

 

[새벽], 1960년 10월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추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앟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1961년 2월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재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 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 곳에 리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하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 라느니 하는 소리는 합당치 않다. 거상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 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장에 한 몫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명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나는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으며 다만 그가 '열심히 살고 싶어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는 풍문에 만족지 앟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태도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진 것이다.

 

------------ 1961.5.16 군사혁명 전

 

 

 

1973년판 서문 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나는 12년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 가지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다.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숨은 바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누가 잠수부를 내려보낼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도 주인공을 삶의 깊이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렇게해서 그가 살아오는 경우 그의 입으로 바다 밑의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요-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그의 연락이 끊어진 데서 비롯하는, 그 밑의 깊이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이명준은  그 암초를 피하지 못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사이에 바다 밑 지리켜, 심도에 대해서는 송신해주었다. 이명준 이후로 나는 연이어 적잖은 수의 잠수부를 같은 해역에 내려 보냈다.말할 것도 없이, 지금이라면 이명준이 혹시 목숨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만큼의 심해 정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다. 그런들 한번 간 사람에게야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저 마음을 달래볼 수 있는 한가지 길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잘 쓰기만 하면 숱한 잠수 벗들에게 유익할 수 있는 심해 정보의 쌓임이 이명준에서 비롯되었고, 그는 안내 없는 바다에 내려간 용사였음을 다짐하는 일이다.

 

12년 전에 내가 [광장]을 쓴 것도 바로 용사의 기념비였고, 묘비명의 뜻이었다. 그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묘비명에 보탤 것도 깍을 것도 없다. 다만 바람먼지에 얼마쯤 파묻힌 비면의 때를 씻어내는 일을 하였다.

 

이명준, 나의 친구여. 그제나 이제나 다름없는 나의 우정을 받아주기를, 고이 잠들라.

 

1972.10. 17. 유신선포

 

 

 

1976년 전집판 서문

 

이번 개정판에서 고친 것은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바꾼 일이다. 예술로서의 소설 문장의 본질은, 표기법에 따라서 높고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표기를 가지고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례적 표현과 어떤 심상이 오래 결합되어 쓰이고 보면, 심상의 형성과정- 의식과 현실 사이의 싱싱한 갈등의 자죽이 관례적 표현으로서는 나타내기가 미흡해 보이는 때가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표현이 낡아진 것이 아닌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여럿 되겠지만, 그 한가지는 의식이 보다 더 깊게 현실과 어울리는 힘을 가지게 될 때다.

 

[광장]은 이번으로 다섯번째 개정인데, 나는 이 여러 번의 개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적어도, [광장]이라는 이름의 작중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 쓸 때보다 훨씬 익숙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개정에서는 보태야 할 데라든지, 빼야 할 데, 플롯에서 중요한 데를 바꾸고 새로 맞춰넣어야 할 데가 거의 저절로 떠올랐다.

 

다음에 고친 것이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고친 일이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과정을, 이미 만들어진 한자어에 밀어버리고도 그런 줄 모르게 될, 표기에서 오는 함정을 감추고 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반드시 비한자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즉 그 한자어를 문맥 속에서 더 꼼꼼하게 정희하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워진다.

 

이 판에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길을 골랐다. 그런 관습에서 너무 멀어져야 할때는 거기서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부피로 보면 그대로 둔데는 얼마 되지 않는다.이 같은 표기상의 바꿈 말고도, 표현도 바꾸는 것이 좋다고 느낀데는 눈에 띄는대로 바꿨다.

 

 작자의 사정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개정 내용들이  나의 짐작으로는, 이명준의 사람됨과 그의 걸어간 길을 독자에게 좀 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975년 유학생을 가장 일본서 잠입 암약하던 학원침투 북괴 간첩단 21명 검거1978년 최은희 납치사건

 

 

 

1989년 판을 위한 머리말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차츰 자리잡아온 가로쓰기의 관행에도 맞추고새로나온 표기법에도 맞출 수 있게 된 이번 판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운 형식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판에서도 몇 군데 내용이 고쳐졌다.언제나처럼 큰 흐름에는 영향이 없고 그 흐름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첫 발표로부터는 30년,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여전히 필자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준은 그가 살았던 고장의 모습이 40년 후에 이러리라고 생각하였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당자가 아니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현실의 결고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한국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유보없는 꿈과 희망에 휩싸인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의 생전에 결국 그런 꿈과 희망이 쉽사리-적어도 그이 감각만큼은 그렇게 유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 것이지만, 40년이 지난 다음에 지금 같은 상태라고는 다시금 짐작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무의식을 짐작해보는 일은 그렇다고 하고, 작가인 필자의 사정을 말해본다면,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필자 자신의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확실히 떠올릴 수 있어서가 아니고, 어렴풋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주인공이 마주친 인생 문제도 상대적으로 시대와 더 관련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보지만   두 부분이 깨끗이 나누어진 모양으로 제출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문제'의 라는 표현은 다만 비유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먼저 이렇게 저 문제에 다음에 저렇게, 하는 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인생 '문제'의 성격이다. 그 성격에 비교적 어울리는 형식이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만나는 것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자기와 만난다는 자기 인식으로 돌아온다.

 

이번 판에서 고친 부분에서도 그 무렵의 주인공의 능력과 자연스러움에 변화를 주는 일 없이 그 무렵의 그만한 젊은이의 생활과 생각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1988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폭로, 연대생 서울 미문화원 점거

 

 

 

오늘 방문한 집의 책꽂이에서 발견한 [광장]오래만에 본 [광장]이다. 책장을 후두둑 넘겨보았다. 낯익은 문장들이, 혹 낯설은 문장들이.....

 

[광장]을 처음으로 읽은 것이 대학교 1학년인 듯 한데, 그때 어찌 어찌 내손에 굴러 들어온 것은 세로줄판 [광장]이었다.

 

난 저자의 약력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세로판 활자라는 것만 생각하고 무지 오래된 책.그러므로 저자인 최인훈은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줄로 한동안 알았던 듯 싶었다.

 

그 때 내가 알던 소설가는 이문열과 박완서 박경리, 최일남,,, 뭘 그런 사람들이었으므로...최인훈은 나에겐 낯선 이름이었으므로......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처음 읽었을 때와는 점점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광장]을 몇 번 더 읽었었다. 사실 [태풍]을 더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리고 오늘 어찌 어찌 [광장]이 내 손에 들여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 책과는 달리 서문이 몇 개나  붙어있다. 서문은 가까운 연대부터 먼 연대의 순으로 앞쪽에 씌여있었다. 그 서문을 한 쪽 한 쪽 정성스레 읽어보았다.

 

뭐 좀 이상하다. 그래서 모두 두드려보았다. 최인훈은 [광장]이 재판에 들어갈 때마다 고쳤다고 한다. 고칠 때마다 서문을 썼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골격은 서문에서 그가 밝힌 대로 그 뼈대를 유지하고 윤색했겠지만, 오늘 그 보단 이 서문이 더 흥미로웠다.

 

어느 서문에서는 이명준이 된 듯 어느 서문에서는 이명준을 완전한 객체로 또 어느 서문에서는 이명준을 외면하며

 

이 서문이 쓰여진 그 당시의 사회 곧 광장.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지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감사한 맘을 느끼게도 입을 다물게 하기도 하고혹은 언급하게 하였는지..

 

그의 서문에서 보여주는 광장도 밀실과 가장 근접해 있다. 창을 열면 광장이고 창을 닫으면 밀실이다.

 

광장

 

서문으로 다시 한편의 광장이 완성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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