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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박상순] 공구통을 뒤지다가

by 발비(發飛) 2006. 2. 15.

공구동을 뒤지다가

 

박상순

 

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목,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버스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뽀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에 나도 여덟살이 됩니다

여덟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목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봄, 이케와키 치즈루의 무덤

 

봄에 둥근 화단을 봅니다.- 상상은 하지마. 더 이상은.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좁아지고 또 갑자기 늘어난다 해도. 갑자기  그 자리가 해안이 되고, 파도가 밀려오고, 두 팔을 허공으로 벌린 채 네가 밤 바다에 떠 있는 섬이 되버린다 해도.

 

봄에 둥근 화단을 그려봅니다.- 더 이상은 하지 마. 네가 나를 구원할 수는 없어도.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없어도. 두 팔을 벌린 채 섬이 되어버린 네가, 먼 바다 끝으로 점점 밀려간다 해도, 네 뒤에 서 있던 내가 영영 네게서 사라진다 해도

 

봄에 둥근 화단에서 이케와키 치즈루를 봅니다.- 더 이상 그런 상상하지마. 이제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꽃 향기가 날리고, 향기로운 밤의 나무 아래 떨어진 한 잎의 눈물이 되어도

 

봄에 둥근 화단을 봅니다.- 너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워.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워. 그런 상상으로 만들어버린 네가 고통스러워. 더 이상은 하지마, 상상은

 

(이케와키 치즈루는 아직 살아있는 여인의 이름입니다.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겨우 태어난 직후의 나를 이끌고 봄의 둥근 화단을 빙빙 돌아보게 해주었던 그녀가 바다를 건너기 전, 스물네 살 봄에 가졌던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1984년에 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가는 길이 더 멀고 외로우니

 

현실에 몸을 두고 살기가 외로워 의자 위에 내 몸을 올련놓습니다. 올려놓고 보니 불편한 의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의자도 현실입니다. 이번에는 의자를 몸 위에 올려놓아 봅니다. 무겁습니다. 의자를 내려놓고 나 자신과 맞서보기로 합니다, 온갖 사실들이 기억의 창고에서 쏟아져나옵니다. 한동안 그것들과도 맞서보지만 여전히 의자 하나 놓여 있습니다.

 

저 하늘엔 비행기가 갑니다

 

그래서 외로운 나도 길을 나서봅니다. 우연도 필연도 아닌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내 좁은 경험을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혼자 가기가 심심하기는 하지만 큰 길을 따라 강변까지 나갑니다. 이제 계단을 내려가면 강입니다. 오른 발 왼 발, 강변에선 함부로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른 발 왼 발, 나는 갑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고 합니다

 

강변에 나와 바람을 쏘입니다. 눈을 감아봅니다. 내 의식이 바람 속에서 눈을 뜹니다. 내 몸은 풀밭에 누워있습니다. 누워있는 몸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바람을 쏘인 탓인지 의식이 자꾸 가벼워져 몸 밖으로 새나갈 것 같습니다, 하나 둘, 새어나갑니다. 새나가고 맙니다.

 

저 하늘엔 비행기가 갑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간다고 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이 더 멀고 외로우니 나는 잠시 여기서 멈춰 있으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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