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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

by 발비(發飛) 2006. 2. 18.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세상에서 옳다 그르다 함에 대하여

혹은 잘 한다 못 한다에 대하여

또 혹은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에 대하여

 

신념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 말인가?

 

이 시는 하나의 막을 내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단락이 끝내고 그 성공과 실패를 그냥 그려내고 있다.

목사님은 자신이 살았던 한 막을 돌아다본다.

연극배우가 자신이 섰던 무대를 한 막을 끝난 뒤 둘러보며 자신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처럼

자신이 했던 대사에 환호하던 자리와

자신이 무게를 주어 대사를 했으나 관객의 반응이 없었던 자리를 둘러본다.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

꼼꼼히 기억이 난다. 자신의 무대였으며 자신이 주인공이던 곳이기때문이다.

이제 그 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예정공연일수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들이나 조연들이나 그 곳에 있을리 없다.

실패라는 이름뒤에는 그 자리가 성글기 마련이다.

 

극의 해석이 다르다.

난 내가 주인공이므로 내 삶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란다.

좀 달라야 한단다/

그래야  살기가 편해진단다

살기가 편하다는 것은 무엇?

그것은 내 주위에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이 많아야 살기가 편해진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이나 느낌이 같다는 것이지. 그것의 옮고 그름의 잣대는 아니다.

옮고 그름이 아니므로 잘 했다 못 했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그릇모양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그 곳을 떠난다.

아이를 잃었다,

그것도 그 목사의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저 멀리 상황에서는 소위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잣대가 고르다, 말하자면 도덕교과서적의 잣대가 적용된다.

하지만 근거리 상황에서는 도덕교과서는 통하지 않는다.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경제교과서 혹은 처세교과서가 그것을 우위한다.

개인이 중심이 된다.

목사님!

이제 그 분이 다른 곳으로 가신단다.

혹 어느 곳에 가면 아직 신념다운 신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겠지 ...

 

이제 한 막이 내리고,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배우는 같다. 배우의 극 해석시각도 같다.

그저 무대가 다르고 관객이 다를 것이다.

혹 기립박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흐처럼 말이다.

 

 

 

하지만,

목사님이

혹은

내가

이 세상에서 있을 적에 그 곳을, 그런 상황을 맛보았으면 싶다.

멀리 멀리 떠나기 전에 말이다.

 

고흐처럼 말이다.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세상에서 옳다 그르다 함에 대하여

혹은 잘 한다 못 한다에 대하여

또 혹은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에 대하여

 

신념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 말인가?

 

이 시는 하나의 막을 내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단락이 끝내고 그 성공과 실패를 그냥 그려내고 있다.

목사님은 자신이 살았던 한 막을 돌아다본다.

연극배우가 자신이 섰던 무대를 한 막을 끝난 뒤 둘러보며 자신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처럼

자신이 했던 대사에 환호하던 자리와

자신이 무게를 주어 대사를 했으나 관객의 반응이 없었던 자리를 둘러본다.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

꼼꼼히 기억이 난다. 자신의 무대였으며 자신이 주인공이던 곳이기때문이다.

이제 그 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예정공연일수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들이나 조연들이나 그 곳에 있을리 없다.

실패라는 이름뒤에는 그 자리가 성글기 마련이다.

 

극의 해석이 다르다.

난 내가 주인공이므로 내 삶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란다.

좀 달라야 한단다/

그래야  살기가 편해진단다

살기가 편하다는 것은 무엇?

그것은 내 주위에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이 많아야 살기가 편해진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이나 느낌이 같다는 것이지. 그것의 옮고 그름의 잣대는 아니다.

옮고 그름이 아니므로 잘 했다 못 했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그릇모양대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그 곳을 떠난다.

아이를 잃었다,

그것도 그 목사의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저 멀리 상황에서는 소위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잣대가 고르다, 말하자면 도덕교과서적의 잣대가 적용된다.

하지만 근거리 상황에서는 도덕교과서는 통하지 않는다.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경제교과서 혹은 처세교과서가 그것을 우위한다.

개인이 중심이 된다.

목사님!

이제 그 분이 다른 곳으로 가신단다.

혹 어느 곳에 가면 아직 신념다운 신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겠지 ...

 

이제 한 막이 내리고,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배우는 같다. 배우의 극 해석시각도 같다.

그저 무대가 다르고 관객이 다를 것이다.

혹 기립박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흐처럼 말이다.

 

 

 

하지만,

목사님이

혹은

내가

이 세상에서 있을 적에 그 곳을, 그런 상황을 맛보았으면 싶다.

멀리 멀리 떠나기 전에 말이다.

 

고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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