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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윤제림] 손목 외

by 발비(發飛) 2006. 2. 11.

늦은 감상문

 

 

며칠, 신현림시인의 시와 산문을 좀 읽었다.

길들여진다는 것.

며칠 주섬주섬 읽는 신현림시인의 시는 그래 그렇지....

사람의 모습이 다양한 것만큼 시도 다양한 것이지.

 

신현림시인의 시를 두드려놓고, 또 우연히 만난 윤제림시인.

 

시인이란?

내가 좋아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참 많은 시의 기능 중, 자신의 취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손목이라는 시를 읽고 내 몸에 생기는 전율.

몇 줄의, 몇 마디의 글을 읽고 장편 소설 한 권을 읽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글에 나와 있지 않는 수많은 사연들을 상상하는 기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그의 삶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울었을까. 아님 체념했을까

시인은 어떤 맘이었을까......

 

혼자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하게 되는 것.

그 순간 마치 몇 미터쯤 땅을 파고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

언젠가는 지구의 핵까지 파고들어가야 한다면, 건너뛰기 한 판한 느낌.

 

길게 말하지 않고

아니 되도록이면 말하지 않고

손목을 쓴, 소쩍새를 쓴 시인처럼 내 심겨질 땅을 스스로 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 살 것이라면 말이다.

삶을 알고 싶다면 말이다.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 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쓰게 되었으니

묻어 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노인은 박수를 친다

 

약수터 옆 소나무 아래서

노인이 박수를 친다

산을 보며 박수를 친다

몸에 좋다니까 손뼉을 친다고?

아니다 추풍낙엽.

파하고 돌아가는

가랑잎 단풍잎한테 잘 가라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노인은

다시 저기 와서 박수를 칠 것이다.

산을 보며 박수를 칠 것이다

꽃들에세 어서 오라고?

아니다 화란춘성.

꽃 시절 다시 맞는 스스로에게

격려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소쩍새

 

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소쩍......쩍

쩍......소ㅎ 쩍......

ㅎ쩍

......훌쩍......

 

누군가 울 땐

가만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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