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베란다에는 롤스크린이 쳐져있고 방안에는 커튼이 쳐져있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하니? 나와라. 눈온다."
"아니, 그냥 있을래."
난 요즘 집귀신이 되었다.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마구 쏘다니던 난 요즘 집귀신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 참 밖을 볼 생각을 않는다.
'눈이 온다구?'
베란다로 난 창을 열었다.
내게 보여준 눈 세상의 첫 모습이다.
롤스크린을 다 닫아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다 닫기에는 세상이라는 곳에 미련이 남아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 혼자만의 공간이길 원하지만, 그래도 바깥 세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창을 열었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나보다.
가로 50센티 세로50센티 정도의 공간이 내가 열어둔 세상의 크기였다.
그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발을 베란다 쪽으로 몇 발자국 내딛고 창 앞에 섰다.
그러자 작은 창구멍은 이제 눈 전체에 들어찼다. 물론 창살이 있기는 했지만,
오돌오돌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 눈이 오는 세상을 내려다 본다.
내가 열어놓은 50*50세상에 바짝 다가가 눈내리는 바깥을 보았다.
그렇군! 눈이 내리고 있군!
일요일에 눈이 내리고 있군!
사람들이 거리에서 흥분된 얼굴로 웃고 있겠군!
운전대를 잡은 중년들은 좀 짜증스러운 얼굴이겠군!
경비아저씨들은 대빗자루로 아파트 계단을 열심히 쓸고 계시겠군!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조르고 있겠군!
커피점 창가 자리는 어느때보다 쟁탈전이 심하겠군!
서점은 좀 한가하겠군!
강변에 서면 한쪽은 하얀 빛 한쪽은 물빛 선명히 대비가 되겠군!
봉화신부님 성당은 온통 하얗겠군!
(하늘에 편지 쓸 사람도 없겠군!)
나무들 중에는 소나무가 눈이 내리면 가장 티가 많이 나는데... 이쁘겠군!
내가 보는 세상은 50*50 세상인데, 난 내가 살아왔던 일때문에 참 많은 상상을 한다.
내가 살아왔던 일들이 기쁘기도 혹은 슬프기도 하지만
살아왔던 일 때문에 눈을 맞지 않고도 눈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구나.
나
지금이라도 나가서 앞으로 또 언젠가 내가 상상해야 할 거리 하나쯤 만들어야 하는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한다.
어느 날
난 생각할 것이다.
어느 해 12월 몹시도 앓은 끝자락에 눈이 내렸었지.
마치 한바탕 앓고 난 뒤
끙끙 앓으며 내린 나의 결론에 확인 싸인이라도 하듯이 하얗게 눈이 내린 날이 있었지.
그 눈을 보면서 난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했었지.
좀 미우니까......
항상 이방인으로 두는 세상이 미우니까.....
난 항상 세상을 향해 습관처럼 웃고 있는데, 그런 것 같은데,
세상은 언제나 나를 이방인 취급하니까, 미워서 난 모른척 하기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지.
그리고 내가 내놓은 작은 창조차 닫아버리고 난 방으로 들어와버렸었다고.
어느 날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을 할까?
그땐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세상과 잘 지내잖아. 이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그때처럼 지금도 난 이방인이야. 이렇게 생각할까?
몸과 마음
다시 한번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라는 책이 생각난다.
마크 트웨인은 아무리 애를 써도 몸과 마음은 따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 몸은 언제나 세상에서 웃고 있는데
내 마음은 언제나 세상에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눈이 내리는 날
작은 창도 닫아버린 날
나는 몸과 마음, 둘 다 제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둔다.
몸은 이 방에서 자고 싶으면 자라고,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놀고 싶으면 놀라고 내버려두고
마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누구와 누구와 누구를 건너다니게 내버려두고,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처럼 제 멋대로 살라고 내버려둔다.
세상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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