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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세상의 크기

by 발비(發飛) 2005. 12. 18.

바깥 베란다에는 롤스크린이 쳐져있고 방안에는 커튼이 쳐져있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하니? 나와라. 눈온다."

"아니, 그냥 있을래."

난 요즘 집귀신이 되었다.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마구 쏘다니던 난 요즘 집귀신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 참 밖을 볼 생각을 않는다.

'눈이 온다구?'

베란다로 난 창을 열었다.

 

 

내게 보여준 눈 세상의 첫 모습이다.

롤스크린을 다 닫아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다 닫기에는 세상이라는 곳에 미련이 남아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 혼자만의 공간이길 원하지만, 그래도 바깥 세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창을 열었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나보다.

가로 50센티 세로50센티 정도의 공간이 내가 열어둔 세상의 크기였다.

그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발을 베란다 쪽으로 몇 발자국 내딛고 창 앞에 섰다.

그러자 작은 창구멍은 이제 눈 전체에 들어찼다. 물론 창살이 있기는 했지만,

오돌오돌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 눈이 오는 세상을 내려다 본다.

내가 열어놓은 50*50세상에 바짝 다가가 눈내리는 바깥을 보았다.

 

그렇군! 눈이 내리고 있군!

일요일에 눈이 내리고 있군!

사람들이 거리에서 흥분된 얼굴로 웃고 있겠군!

운전대를 잡은 중년들은 좀 짜증스러운 얼굴이겠군!

경비아저씨들은 대빗자루로 아파트 계단을 열심히 쓸고 계시겠군!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조르고 있겠군!

커피점 창가 자리는 어느때보다 쟁탈전이 심하겠군!

서점은 좀 한가하겠군!

강변에 서면 한쪽은 하얀 빛 한쪽은 물빛 선명히 대비가 되겠군!

봉화신부님 성당은 온통 하얗겠군!

(하늘에 편지 쓸 사람도 없겠군!)

나무들 중에는 소나무가 눈이 내리면 가장 티가 많이 나는데... 이쁘겠군!

 

내가 보는 세상은 50*50 세상인데, 난 내가 살아왔던 일때문에 참 많은 상상을 한다.

내가 살아왔던 일들이 기쁘기도 혹은 슬프기도 하지만

살아왔던 일 때문에 눈을 맞지 않고도 눈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구나.

지금이라도 나가서 앞으로 또 언젠가 내가 상상해야 할 거리 하나쯤 만들어야 하는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한다.

 

어느 날

난 생각할 것이다.

 

어느 해 12월 몹시도 앓은 끝자락에 눈이 내렸었지.

마치 한바탕 앓고 난 뒤

끙끙 앓으며 내린 나의 결론에 확인 싸인이라도 하듯이 하얗게 눈이 내린 날이 있었지.

그 눈을 보면서 난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했었지.

좀 미우니까......

항상 이방인으로 두는 세상이 미우니까.....

난 항상 세상을 향해 습관처럼 웃고 있는데, 그런 것 같은데,

세상은 언제나 나를 이방인 취급하니까, 미워서 난 모른척 하기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지.

그리고 내가 내놓은 작은 창조차 닫아버리고 난 방으로 들어와버렸었다고.

 

어느 날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을 할까?

그땐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세상과 잘 지내잖아. 이렇게 생각할까?

아니면, 그때처럼 지금도 난 이방인이야. 이렇게 생각할까?

 

몸과 마음

다시 한번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라는 책이 생각난다.

마크 트웨인은 아무리 애를 써도 몸과 마음은 따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 몸은 언제나 세상에서 웃고 있는데

내 마음은 언제나 세상에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눈이 내리는 날

작은 창도 닫아버린 날

 

나는 몸과 마음, 둘 다 제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둔다.

몸은 이 방에서 자고 싶으면 자라고,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놀고 싶으면 놀라고 내버려두고

마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누구와 누구와 누구를 건너다니게 내버려두고,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처럼 제 멋대로 살라고 내버려둔다.

 

세상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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