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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고대산.우리는..

by 발비(發飛) 2005. 10. 3.

몇 달만의 휴식인 일요일을 보내고, 고대산으로 향한다.

경기도 연천군 산서면 대광리...

의정부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마지막역인 신탄리역 하차...

기차가 갈 수 있는 마지막역이다.

마지막.... 그 곳은 그들에게는 시작점이다. 우린 마지막이고 그들은 시작이고...

그 곳에 고대산이 있다.

 

모처럼 휴식... 간단한 밑반찬을 준비했다.

항상 나의 산행 음식은 삼각김밥이었는데, 반찬이란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도시락을 챙긴 가방이 좀 낯설다.

 

 

의정부역에서 신탄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기찻길...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 본 것이 처음이다.

항상 남으로만 내려갔었는데...

기분이 묘하군!

 

국도의 아스팔트 길도 곧게 뻗어있지만, 줄의 넓이때문인지 가속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길을 보고 있노라면, 달리고 있지 않는데도,

마치 내가 어딘가로 쌩하니 가고 있는 느낌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 난 벌써 홀로 기차길을 따로 가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 것처럼, 누군가가 기다리기도 할 것처럼....

 

신탄리역에서 10분 정도 걷자 바로 산행이 시작한다.

서울서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많다.

고대산행의 재미있는 점은 산행을 하는 거의 모두들 기차를 타고 왔으므로,

함께 등산을 하는 것은 아닌데.. 마치 함께 등산을 하는 것처럼

같이 출발하고, 같은 시간 기차를 타야하므로 같이 산행을 마친다.

좀 웃겼다. 그런 상황이....

 

그냥 서울 근교의 산이니까..

그렇지 뭐!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한 산행은 나를 무참하게 깨트렸다.

 

같이 갔던 동료의 말처럼.. "이 산은 설악의 공룡능선을 타는 것 같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깔딱고개가 참 많다.

하지만 재미있는 산이라고 봐야 한다.

줄타고 올라가는 구간도 있고, 한번 깔딱고개를 넘을 때마다 보여주는 풍경이 멋지다.

몇 번의 깔딱고개,, 꽤 깔딱고개...

산행의 긴장감을 주는 바위들..

그리고 깔딱이 지난 뒤의 짧은 능선...

 

가을이었다.

땀이 뻘뻘 나다가도 잠시 쉬면 서늘한 바람이 금방 시원했다. 그게 가을산이다,

쉬면 바로 시원한 것....

 

 

깔딱고개들을 넘을 수 있는 힘은 그 고개뒤에 보여주는 남쪽 하늘과 산이다..

방금 내가 내린 신탄리역이 보인다.

철로따라 온 길도 보인다...(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사실 맑은 날이었는데, 지금 카메라의 상태가 안좋아서, 모두 흐림으로 나온다... 에구.

 

산이 드디어 뼈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록으로 단단히 팽창되던 산은 이제 무장해제기간이다.

제 풀에 색이 죽고, 잎을 떨어뜨리고.. 기운을 빼고 있는 중이다.

길게 이어진 능선이 늙어버린 누구의 등뼈 모양을 하고 있다.

살신공양중이시다..

떨어진 낙엽들을 내가 지나가며 꼭꼭 밟는다. 잘게 잘게 부서뜨려 살신공양를 재촉한다.

내년 봄에 다시 거듭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렇다...

 

 

 

곳곳에 이런 벙커가 있다.

벙커의 위에는 기호가 붙어있고,,, 지금은 자리만 남아있다.

마치 꽃 진자리처럼 자리만 남아있다.

 

벙커마다 가을꽃이 한창이다.

고대산은 유난히 보라색 꽃이 많았다.

꽃향유와 산부추, 고들빼기, 왕고들빼기, 구절초, 쑥부쟁이.

영락없이 벙커마다 꽃향유가 무리를 지어 피어있었다.

그저께 다녀온 오대산에 야생화들이 다 시들어버린 것에 비교하면 만발한 편이다.

마치 어느 혼들의 꽃인들 하여 기분이 이상했다.

보랏빛... 그 색은 마치 영혼의 색인 듯 싶었다.

 

벙커.. 이상한 저림.

보라색 꽃향유... 그것 또한 이상한 저림..

정상 가까이에 오자 벙커는 몇 발자국 건너 하나씩,, 지금은 모두 꽃으로 덮혀버린 그 곳.

누군가 이야기 한다.

 

"이제 전쟁이 나도 이런 벙커는 필요없지. 그 자리에서 끝나버려?"

'정말 그럴까?'

 

벙커에서 하는 전쟁, 그것도 그리워해야 할 것인가...

가시돋힌 보랏빛 꽃향유,,, 벌들에게 제 몸을 맡겨 놓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섰다.

흐릿해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백마고지.. 그리고 한탄강...

보이지 않아도, 누렇게 익어가는 논이 짠하다..

보는 것!

지금 보고 있는 곳!

그 곳이 갈 수 없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참 둔감해졌구나.. 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난 뉴스나 신문을 별로 보지 않는다. 그것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북한이라는 나라가 마치 이란성쌍둥이처럼 인식되어버린 어느 순간이 있었다.

얼마전 본  [어떤 나라] 그 영화를 볼 때처럼 이제는 좀 떨어져 버린 느낌..

항상 한 몸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래서 잘려나간 상처처럼 아픈 곳이었는데.

이제 언제부터인가 그냥 이란성쌍둥이가 되어버렸다. 내 안에서....

쌍둥이 형제가 멀리서 감기를 같이 한다는 것처럼,

그저 그런 것...

 

샴쌍둥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나? ㅋ

그 중 한 명은 나누었으므로 약한 놈도 있었던 건가?

그런 느낌으로 북쪽을 본다. 아마 지금부터 10년전쯤이라면, 난 목이 메었을텐데...

남부군을 보면서도 지리산에만 가도 목이 메었었는데..

대단한 애국자가 아니라, 헤어져있는 것이 슬퍼서 그랬는데.. 이젠 이골이 났나보다..

 

철원평야의 벼가 누렇다. 누렇게 익어가더라... 참 누렇다.

 

 

산행을 마치고 기차를 기다린다.

마지막 기차역인 신탄리.. 다시 올 것이다. 아마 오래지 않은 시간에 다시 올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그 곳이 그리 쾌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난 그 곳에 아마 다시 가고 싶을 것이다.

 

즐건,,, 뭐랄까? 고대산은 재미있는 산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치 숙제처럼 마냥 즐거워만 해서는 안되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있는 산이었다.

그 곳 술집에서는 소리높여 이야기하면 괜히 미안할 것 같다.

 

욕쟁이 할머니집이 유명하다던데,, 그 곳엔 가지 못했다.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나에게 찍힌 그 곳이 어디인지 알아볼 수 없다.

가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고, 차라리 기차안에서 있는 이들이 유리창을 통해

어릿어릿 보인다.

 

짧은 여행이 끝나는 저녁이다.

다시 산을 오르며, 다시 산을 내려오며...

 

"넌 무쇠로 만들어졌니?"

친구의 말이다.

"아니, 힘들어, 다리도 아프고 몸도 피곤하고 힘들어."

난 그렇게 속으로 말한다.

 

그래도 또 가고 싶다. 왜? 그건 나도 모른다.

보고 보고 자꾸 보고 있으면, 또 보고 싶다.

조금씩 얼굴을 익히기 시작한 산과 꽃들..

곧 말을 트고 지낼 날도 있을 것 같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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