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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태어남과 죽음

by 발비(發飛) 2005. 7. 6.

태어남에 대해서

 

오일장에서 감자를 판다.

장사치는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 "맛나요. 분나요!' 연신 주문을 왼다.

지나가던 여인네가 감자에게 눈길을 주더니, 몇 번의 흥정을 하더니,

커다란 봉지에 감자를 담는다.

때로 덤을 찾기도 하지만, 장사치는 작은 감자를 챙겨서

"덤입니다"

그 소리가 의기양양하다.

사실 여인네에게는 덤이 필요하지 않다. 감자를 샀으니까....

덤을 챙겨오면서 계획했던 크기의 감자야 맘먹었던 대로 쪄 먹으면 되지만,

덤으로 얻은 감자는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고민하게 된다.

덤으로 얻은 감자는 그래서 어떤 요리가 될 지 모른다.

그건 그때가 되어봐야 한다.

때론 맘먹었던 감자보다 나은 요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맘에 안드는 요리가 되기도 하고

때론 미루다 미루다 그냥 독을 품은 감자싹이 돋아 그대로 버려지기도 한다.

 

 

태어남,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덤이었다.

덤으로 태어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잠자리에서 얻는 쾌락. 그것의 덤. 덤으로 태어난 것이다.

처음부터 덤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무지무지 사랑을 했단다. 원하는 사랑을 했단다.

사랑을 하는 동안엔 생명이라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단다. 둘은 서로에게 서로만 필요했단다. 그런데 덤으로 생명이 나온 것이다.

처음부터 삶은 덤인 것이다.

남녀가 덤을 보고 당황해한다.

 "이걸 어떡하지"

때로는 덤을 보며 반가워하고, 때로는 얻어오지 않아도 되는데 후회를 하기도 하고

덤으로 주는 생명이 쓸만하기도 하고,

아니면 폐기처분 직전의 것을 덤으로 받기도 하고.

계획에 없던 것이라 계획을 세우느라 그냥 썩어없애기도 하고.

인간의 태어남은 그냥 덤이다.

 

이브의 탄생은 그 덤의 시작인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스러운 물건으로 정성스레 만든 것이 아담이라면,

이브는 아담의 삶을 즐겁게 해주는 그런 탄생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덤이었다.

덤인 인생은, 불안정하다.

덤에서 극복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쓸만한 덤!

그런 것은 애초에 없을 것이다.

덤인 인생은 그래서 불안정하다, 이브처럼 유혹에 넘어간다.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이 외로울까봐 만들어진 이브처럼,

그 이브는 안다.

자신이 아담의 갈비뼈 한대로 만들어진 덤이라는 것을...

그걸 알기때문에 선악과를 먹었을 것이다.

계획된 아담은 결코 선악과를 먹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것을...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이브의 자손이다.

태어남은 그렇게 덤으로 시작했다. 이브처럼 덤으로 시작했다.

덤인 삶.....

결국은 덤이다. 가볍게 살 수 있는 덤이다.

 

 

 

죽음에 대하여

 

 

 

자두 한 알을 배어 물었다.

 

껍질이 터지듯 작은 소리와 함께 자두의 육질이 혀를 녹인다.

부드러운 듯 시고, 사각거리는 듯 물컹하다.

몇 번을 씹는동안, 껍질과 육질은 번갈라가며, 나의 혀를 현란하게 만든다.

시고도 달콤한, 때로는 이가 시리기도 한.....

몇 번을 배어먹고, 내 혀는 단단한 씨를 만난다.

그것은 깨지도 먹지도 못한다.

씨를 뱉아낸다. 씨는 어느 나무아래 입에서 바로 튕겨져 나가기도 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지기도 하고.

마냥 햇빛 아래 그냥 던져지기도 한다.

이제 그 끝을 만난 것이다.

자두의 끝은 씨인 것이다. 자두의 끝은 씨가 밖으로 드러나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씨를 버렸다.

그것으로 이 곳에서의 자두는 끝이 난 것이다.

 

언제부터 그 안에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내가 씨라고 보는 것은 씨가 아니라, 씨의 껍질이다.

씨의 껍질이 안고 있는 것, 아마 그것이 주검일 것이다.

죽음..... 그것은 우리가 자두를 먹으며 씨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처음부터 씨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죽음이라는 씨를 단단한 씨의 껍질 속에 넣어두고,

육질이 여물고 자라듯 죽음이라는 씨도 자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달콤하고도 신, 그런 인생이 팽창되어가면 갈수록, 죽음이라는 씨도 같이 커져가는 것.

빨리 자라 결실이 빠른 열매는 빨리 거두어들인다.

딱 그만큼만 하고 우리는 태어난 것이다.

"더는 필요치 않아, 넌 먹기 좋을만큼만 자라면 돼"

죽음을 맞이 한 사람들은 잘 자라 수확이 된 열매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죽음이라는 씨앗을 드러내기 위한 삶

우리의 삶은 자두씨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이 나듯,

그리고 탱탱하게 여문 씨앗이 그 껍질을 뚫고 나와 새로운 나무가 되는...그런 윤회

 

아직은 여물지 않은 어리석은 삶이 계속된다.

탱탱히 여물어 과즙 뚝뚝 떨어지는 그런 삶 뒤에 죽음조차도 탱탱한 그런 자두 한 알이 꿈이다.

여물지도 못하고, 낙과 되는 그런 자두....

육질의 썩어들어감을 서서히 맛보면서 드러내는 죽음이라는 씨.

다시 싹을 틔울 수도 없는 씨, 여물지 못해 씨조차 썩고 만다.

 

요즈음 내가 만난 죽음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씨를 지금도 품고 키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난 태어남과 죽음이다. 그냥 지금 만났다.

다른 태어남과 죽음의 모습도 기다린다. 어느날엔가 다른 모습으로 스쳐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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