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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안도현] 연탄시 세 편

by 발비(發飛) 2005. 6. 17.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 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겨울밤에 시쓰기-

 

연탄불을 갈아보았는가

겨울밤 세시나 네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ㄷ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드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 문을 열어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마라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 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는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 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잔 하고는 좇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연탄냄세에게 자기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더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구 제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반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어,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보면 겨울밤 세시나 네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그의 눈빛은 보는 곳이 없다.

일이 아닌 곳에서 그의 눈빛은 방향이 없다.

눈동자가 텅빈것을 본 적이 있나?

그의 눈동자는 텅비어있었다. 텅비어있어 방향이 없다.

그의 입은 웃을 줄을 모른다. 웃을 줄을 모른다는 것은 웃는데, 그것이 웃는 것이 아니다.

웃으면 더 슬퍼보이는 인상, 그런 입을 가지고 있다.

그의 손은 4계절 주머니속에 들어있다.

손이 갈 곳이 없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주머니속의 그의 손이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가만히 있을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의 걸음은 빠르다.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움직인다.

산책길에도 그는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걷는다.

느린 걸음의 여운을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불안한 사람이다. 아주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도, 그가 보인다.

그는 말했다.

 

"난 누구와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감정을 어떻게 느끼는 지 모르겠어요"

"낯선 여자와 어떻게 한 방에서 자고, 키스를 하고 ..그게 가능한가요?"

 

 

대충 그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설득시킨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설득한다.

지나다,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여러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그는 마치 커다란 맥주잔으로 그의 몸을 덮어놓은 것처럼

그만의 세상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컵안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그 안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바깥 세상의 공기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바람앞에서 어떻게 몸을 지탱하고 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시가 생각이 났다.

내가 그에게 한 마디 던진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사람들이 본다. 그도 본다.

갑자기 이 시가 왜 생각났는지 모른다. 그냥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한 참이 지난 어제 종로에 갔다가 서점에 들러

안도현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시집을 샀다.

그를 위해서 내가 대신 읽어본다.

누구를 위한 이야기였는지, 누구 들으라고 말했던 것인지, 단 한 사람은 안다.

난, 컵속에 들어있는 그를 보면서 내 앞에 있는 벽이 컵속이었음을 알았다.

 

내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던진다.

 

그리고 다른 뜨거운 시들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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