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너라고 말할 때 너는 이미 네가 아니다
너에게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이미 네가 아니다
이름없음으로써 너는 비롯된다 이름함으로써 모든 것이 네게서 태어난다
네 없음에서 네 미묘함을 보며 네 있으므로 내 너를 안는다
너는 있음이라 불리기도 하고 없음이라 불리기도 한다
너의 이름은 어둠이다
어둠과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태어난다
13579는 하늘인가 24680은 땅인가
하늘과 땅의 어디선가
명주를 뱉어내는 조개의 소리, 벽옥을 밀어내는 돌의 소리를 듣고 있다
너는 개똥지빠귀인가 너는 뻐꾸기 시계의 쇠부랄인가
외외한 백두산, 깊고 깊은 한강수
손바닥만한 삼천리 지도를 들여다보면
그 여백에 갇혀 있는 고함소리도 보이는 것 같다
시르르릉 따 스르르르 오경의 피리소리도 절로 우는 것 같다
말이라고 부르지만 처음부터 말이랴
소라 부르지만 반드시 소가 아니다
골새가 해를 쪼고자 나래를 펴니 하늘도 땅도
다만 바라볼 뿐
붕새가 하늘을 뒤덮고 고래가
바다를 들여마셔도 다만 눈감을 뿐
구태여 그 무엇을 가르고 나뉨이 부질없도다
하루는 8만 6천 4백초다
그중 몇 초가 내 몫인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개꽃 뒤에 뒷짐을 지고 선 미류나무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들판에 사는 풀이며 메뚜기며 장수하늘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말을 옮겼다 반짝이는
창유리에게, 창유리에 뺨을 부비는 햇빛에게
햇빛 속의 따뜻한 손에게도 말을 옮겼다
집도 절도 차도, 젓가락도 숫가락도, 구름도 비도
저마다 이웃을 찾아 말을 옮겼다
새들은 하늘로 솟아올라 그 하늘에게,
물고기들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그 바닥에 엎드려
잠자는 모래에게,
아침노을은 저녁노을에게,
바다는 강에게 산은 골짜기에게
귀신들은 돌멩이에게
그 말을 새겼다
빨강은 파랑에게 보라는 노랑에게, 슬픔은 기쁨에게
도화지는 연필에게, 우리집 예쁜 요크샤테리어종
콩지는 접싯물에게, 태어남은 죽음에게
그리고 나는 너에게.
눈부처
돋보기를 쓰고부터,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가령, 눈이 오는 날에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눈 속의 어린 새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눈사람들이 말갛게 비쳐보였다
눈의 나라 숲속 여기저기에서
나무가 되어 웅크린 초록의 새들이
사이사이 기지개를 켜거나 깃을 쳐서
조금씩 눈을 털어내며
저마다 눈사람 하나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세발까마귀며 금계며 봉황과 같은 새들도
반짝이며
함박눈을 타고 넘어와
눈사람마다 은빛 눈썹날개를 달아주는 게 보였다.
눈사람들이 눈의 날개를 휘저을 때마다
함박눈이 쏟아져
이 세상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있는 게
어린 손주의 눈 속 깊이 떠 있는 초록별에 환하게 비쳐보였다
늙은 사기꾼
혹은 너를 다스리고 혹은 너를 섬긴다 농투성이가되어
네 마음의 잡초를 뽑고, 네 마음에 뿌린 씨앗이 싹을 트고
줄기를 뻗도록 도와준다 햇볕이 오면 햇볕을 너에게 주고,
비가 오면 비를 너에게 준다 바람이 와도 너에게 주고,
별빛이며 달빛도 빠짐없이 너에게 준다 거름지도록
똥도 한 바가지 싸놓고 오줌도 아낌없이 너에게 깔겨댄다
이 모두 네 마음에 뻗어나가는 저것들의 뿌리가 실해지는 일이다
푸른 소 엉덩이에 지즐탄 저 사내
여덟 자 여덟 치 늘씬도 하지
세 겹 귀, 큰 눈, 모난 입, 두터운 입술,
성긴 이빨, 누런 눈썹, 넓은 이마,
눈빛도 부셔라
어디로 가나
서쪽 땅으로 뚜벅 뚜벅
무너진 성을 타고 넘네
어미 뱃속에서만 81년
마침내 배나무 아래
어미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통해 세상에 나섰네
한 2백년
사람들 사는 꼴
기둥 아래 서서 적어두다가
너무도 심심해설까
훌쩍 소엉덩이에 올라탄 채 서쪽으로 가는구나
가는 것도 아니고, 멈춰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부는 대로
바람에 실려
그렇게 가는 것처럼
서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네
이 모두가
내 간절함 때문인가
오늘도 가고 있는
늙은 사기꾼의 기막힌 솜씨
단풍 초서
처음에 창힐은 새의 발자국으로 문자를 삼았다
지상에 찍힌 새발자국을 눈으로 더듬으면서,
그 새발자국을 흙에다 옮기면서
그 뜻을 가슴에 새겼다 한다.
그 다음 창힐은
산은 산의 뜻으로
하늘에 문득 나타나는 무지개는 무지개의 뜻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비의 뜻임을 깨우쳤다 한다
이 가을, 나는
사람도 살지 않는 심산,
누군가 불을 싸지른 나무들의 불길 속에서
비자나무 숲은 비자나무 잎으로
주목나무 숲은 주목나무 잎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가는 단풍초서,
군데군데
천년 잠을 자는 달마상의 돌도장,
하늘다람쥐가 재빨리 달아나는 마무리
낙관을 보았다
무당벌레 한 마리가
노래할 것이 모두 사라져도
가끔 노래하고 싶은 충동이 불일듯한다
오늘 밤의 부처는 성난 사냥개처럼 흰 이빨을 보인다
손바닥만한 웅덩이에 떠서 물소리를 죽이는 나뭇잎 하나
그 위에 올라앉은 무당벌레 한 마리가 天下를 즐긴다
皇帝의 깊은 밤을 혼자서 꾸며 주는 달빛이여
오늘 밤의 부처는 도무지 힘이 없다
피도 살도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문을 닫아 걸고 부처되기를 作破할 수밖에 없다.
무인도
사람들은 누구나 무인도를 하나씩 숨겨놓고 있다
나의 무인도는
산해경에 나오는 무인도, 혹은
허균의 율도처럼 바다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대의 눈동자,
죽은 자들의 사리,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런 창을 갖고 있는 무인도
무인도니까,
사람은 물론 살지 않지만
창이 있고, 지붕이 있는 집 한 채를
그곳에 지어 놓았다
북극점을 지나면서, 때로는 성층권에 머물면서
눈밖에는 보이지 않는 하계를 내려다보면서
드골 공항, 미켈란제로 공항, 생텍쥐베리 공항에
나의 무인도는
기수를 내리기도 한다
나의 무인도는 집이기도 하고,
점보여객기이기도 하고,
지하철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문득 사람들이 저마다
숨겨둔 무인도를 공개하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울까 생각해 본다
비천(飛天)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의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의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 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램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었다
구름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랜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내 몸 속의
피와 눈물을 말렸고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
산과 강의 구석구석에 묻어 두었고 불의 넋 물의 흐름으로만
남아 땅속에 묻힌 하늘의 소리 하늘로 올라간
땅 속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떠돌음이여
그러나 나를 하늘도 바다도 어둠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게 하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묶어두는 이 기묘한 넋의 힘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게 하는 이 소리의 울림이여.
사기등잔과 함께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로 가리
닳아 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찌꺼기, 군데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 있는 뼈와 살의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보여라.
새 이름을 불러 주게
어느날 나는 내 이름을 새로이 짓기로 하였네
아버지가 주신 내 이름에 얼룩이 묻어서가 아니었네
사슴과 같은, 해동청과 같은 이름이 부러워서도 아니었네
금강초롱, 묘향덩굴처럼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
꽃을 피우고자 함도 아니었네
1500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에 살던 백인
아마도 푸른 눈에 키가 크고
몸무게는 물론 영혼의 무게도 엄청나게 실한
사람
다만 그를 닮고자 함이었네
그의 피도 나처럼 AB형일까
의치를 하고, 검은 눈에 튀어 나온 이마
곱슬머리의 내가,
로마서 한 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비록 사생아는 두지 않았지만 마음의 죄는 더 많이 지었을 내가 나이들어 총기도 힘도 없는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받아들였다네
여보게 친구들,
그로부터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 이름을 쓸 적마다
마음 속으로 나직히
아우구스티노…… 하고
거듭 태어난 나를 불러
내가 하는 일들을 환히 지켜 보게 한다네
그대들도 나를 떠올릴 적마다
아우구스티노…… 하고
나의 새 이름을 나직히 불러 주게나.
성냥알의 붉은 대가리를 보며
1억년 전, 산호에 틀어박힌 담배씨만한 무당벌레의 달콤한 잠을 생각했다
산호의 붉은 빛 속에,
더 붉은 무당벌레의 등판에
점점히 박혀 있는 잠을 생각했다
성냥알의 붉은 대가리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나도 불붙어 타버리고
검정 실오라기와 같은 연기로 잠 속에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잠 속에서, 시간의 허방 속에서,
침묵의 여자와 나누는 사랑 속에서, 사랑의 색깔은 검정이고, 그 검정을
고통의 붉은 등판에 하나하나 새겨 넣는 일임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죄수의 이마에 먹을 먹이는 자청과 같아
바늘땀마다 떨고 흐느끼며
소리지르며 황홀해 하는 슬픔이라 생각했다
성냥알의 붉은 대가리에 뭉쳐진 유황처럼
불붙어 타오를 죽음에 기대어
붉은 산호의 바다빛 잠과
무당벌레 붉은 등판의 검은 반점을 생각했다.
그 붉은 불 속에 바늘 끝으로 고통을 점점이 새기는 자를 생각해 보았다
세한(歲寒)
뜰앞에 서 있는 한 그루 잣나무로구나
이 나라 땅 속의 온갖 설어움을 모두 뿌리로 빨아들여 푸른 기운이 드높은 잣나무로구나
이 한 몸에 배어 있는 천한 핏기를 오늘밤엔 저 달이 걸러
이 나라 곳곳에 달빛으로 환히 이루어주누나
내가 오직 이름만 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그루 잣나무로구나
이 마음이란 이다지도 고요하여 물결이 잘 수조차 없구나.
심법 재편(心法 才篇)
이 밤의 빈 하늘에 매달린 鳶 하나 바람이여
내가 마음으로 그려놓은 怪石 하나 사라졌다 나타남이여
이 밤을 꾸미는 煩惱여
내가 마음으로 가꾼 墨竹에 찔림이여
마음 편하게 사는 法을 안 이상
무심하고 무심하게 살아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諸君
심법 창편(心法 唱篇)
물소리 위에 흐르는 달을 한벌 떠낸다
原板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은 희미한 달빛이
숨을 죽이고 있다 물이 불어 번쩍거리는
달을 바람에 말린다 바람이 데리고 가는
그 물방울들 속에 사는 작은 새들이 놀라서
뛰어나오고 그 서슬에 原板이 물소리
속으로 깊숙이 사라진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대머리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내 寫眞이여
여뀌꽃 소식
잠들 때마다 내 이름자 다시 외우니
잠든 나를 꿈에게 보내는 길마짓기
하늘밖 어디를 헤매도 말굽소리 당당하여라
보고 듣고 옮길까봐 눈귀입을 봉한다
딴세상 소식을 전했자 미쳤다 할밖에
도닦는 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느니
배꼽밑 한치 세푼 자리에 꿈을 숨기고
희고 잔 여귀꽃 개울물에 떠 흐르듯
여뀌꽃 매운 잎 씹으며 한세상 흘러갈밖에
연꽃
-
심우도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 연꽃은 보이지 않고
우산만한 연잎에 모여든 빗방울들만
비에 젖은 나를 기다리네
어떤 빗방울은 제 몸 속에 피보다
붉은 연꽃을 피워내고
어떤 빗방울은 아직 피워내지 않은 꽃줄기마다
가시를 번쩍이고 있네
어떤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는 꽃술마다
눈을 달아서
늪 가득히 띄운 채
연꽃 보러 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느니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서
보지도 못한 연꽃 속
연실처럼 자라나는
내 얼굴, 내 마음 속 죄만 들키고 말았네.
군데군데 입을 벌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땅속 진흙처럼
어지러운
내 마음의 진창을 들키고 말았네
연을 띄우며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저것은 鳶이 아니어라
얼레를 풀며 마음껏 줄을 놓아 보내는 저것은 결코 鳶이 아니어라
천톤쯤의 바람을 싣고 다른 하늘로 떠나가는 저것은 절대로 鳶이 아니어라
저것은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누군가 키를 부리는 한 척의 배
한마당 기다림의 삶이 돛으로 전신을 펴보이는 한척의 배
火星 아니면 土星쯤에서 닻을 내리고 백 년 뒤의 나를 맞이할 한 채의 집이어라
그리운 이를 찾아 마음껏 물길을 돌려갈 한척의 배여라
지금 내가 하늘로 띄워올리는 鳶은 가오리鳶도 太極鳶도 아니어라
피도 살도 다 버리고 뼈마저 빻아서 뿌리고 난 다음의 빛만 남은 별이어라.
완당에게
-심우도
철쭉오름에서 내가 만나본 괴석은 돌시계 모양이었다
햇빛 환한 날이면 아직도 순결한 피의 분수가 뿜어나오는 듯한
철쭉 무덤을 지키며
이 생에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서
바다만 보이는
철쭉오름 외딴 낭떠러지에서 발을 돋우며
소나기가 초침처럼 후두둑 스쳐가며 써주는 비의 문자
시침으로 박히는 햇빛의 문자나 골똘하게 생각하는가
나 역시
사람의 귀로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초음파의 물결이 보여주는
내 안에 패여진 시간처럼,
응어리지고 상하고 떠돌아다니는 상처나 추스르며
상처 속에 숨겨둔 죽음이나 후벼내느니
그래선가 괴석의 온몸에 새겨진 시계무늬 또한
옛사람이 알려주는 내 상처의 문자처럼 보이느니
탁본이라도 하면
내 안의 돌시계, 괴석의 돌시계에
엉켜 있는 피의 이내, 철쭉꽃 무더기가
금방이라도 예서체로 튀어나올 것같느니.
월명(月明)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쳐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 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자음(子音)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뼛속까지 에는
겨울바람에 全身을 내맡기면서 이 몸뚱이 속의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그도 못하면 벌레가 슬지
않게 말려두기나 하면서 어느날 그렇게 바람이나
쐬면서 되도록이면 바람에 내가 날려가 버리기나
바라면서 그것으로서 이승이며 저승이며 모두
마무리되어질 수 있기나 셈하면서 홀연히
허공에 피어나는 바람의 꽃을 지워버리면서
지상(地上)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별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렸다가도 다시 찾게 된다 개중엔 이승의 몸을 버리고서야 자기의 별을 찾기도 한다 어느 날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갑자기 한 줄기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면 그대 곁의 어느 누가 또 보이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별과 운명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별에 이르지 못한다 별은 언제나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닥다리를 뛰어올라도 움켜 쥘 수 없다 피와 살의 무게가 사람들을 地上에 있게 한다 그것들을 버린다해도 별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 오늘밤은 별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먼 곳에서 한 줄기 등불만 몸을 떨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창자속이 얼마나 더러운가
―雲巖의 無情說法
창자속이 얼마나 더러운가
밥 한덩이 군생선 토막 몇 젖가락 김치 몇 줄거리
꾸역꾸역 밀어넣고
저놈에 대한 노여움 그놈에 대한 시새움
버물여 넣었으니
창자속은 얼마나 넓은가
풀잎마다 배어나오는 땅의 향기로움
공기중에 떠도는 그리움이야
이 세상 어디에서건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더불어 나누어 갖느니
그 중 더러운 것만 내 차지
내 창자 차지.
천지자연경(天地自然經)
靑山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건 풀뿌리나 짐승의 살덩어리뿐
비록 흘러가는 시냇물이며 기괴하게 서 있는 바위산을 취한다 해도
고작 幾捨年쯤 빌리는 것뿐
그와 더불어 終生할 수는 없는 일
봄이 되어서
묵은 그루터기마다 새 가지가 뻗어나고
바위벽에는 꽃과 풀이 어우러져 새옷을 뽐내는가
보이노니 새소리 듣노니 나무의 설레임이나
靑山은 시치미를 떼며
天地自然經을 소리내어 읽어나갈 뿐
아서라
내가 이제는 스스로 산이 되어
내 풀과 나무, 내 바위와 물을 키워야겠다
처음부터 취한 것이 없었기에
靑山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내 알 바는 아니다.
태어날 때
―解脫服에 털옷을 껴입으며
태어날 때 어미에게 옷 한 벌 받았으니
이름하여 解脫服이라네
벌거숭이 그대로 살의 옷 뽐내느니
그렇다면
그대
태어나기 전에는 무엇을 입었오
……
대답하지 못하는 자
죽어
사리가 나온들
무엇하리
……
어차피 대답하지 못할 바에야
털옷이나 껴입고
뼈속까지 에이는 추위를
조금이나마 가려 보았네.
폭포(瀑布)
달에서 크는 내 나무의 높이에서 떨어지누나
폭포수소리
눈을 뜨면 잠의 머리맡
그늘을 비치는 마른 번개의 갈기를 쥐면
별은 별대로 넋은 넋대로 미친 흰 말의 머리를 쳐들고
보라 물에서 타는 내 오뇌
꽃으로 피는 오뇌의 물방울 속 투명히 드러나봬는
一瞬의 生涯여
붉은 열네새 바디가 쿵쿵 울리는 音律에
날카로운 銀槍을 던지며
별은 별대로
넋은 넋대로 萬里의 꿈을
달에서 자라나는 내 나무에 열고
보라 흰 피의 능금꽃
흐드러진 꽃살 속의 꽃비 속의
수천수만의 나비가 어지러운
안단테 알레그로
漏電하는 내 살의 미묘히 五官이 서로
비비며 떨리어 비비는 노래여.
풍어제(豊漁祭) 그 열
그대의 뼈를 태우는 연기가 가득 차 있다
아직도 불붙지 않은 몇 조각의 뼈도 보인다
그것들의 의미(意味)가 재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다 내 기다림의 끝
내 생애(生涯)의 끝에 앉아 있는 새에게
말하겠다
그것들의 불꽃이 지나간 다음의 불꽃을.
낯선지옥
낯선 삶을 사랑하기로 했어
모르는 방에 누워 바깥을 잊기로 하였지
아직도 남아서 공기 속에 키들거리며 떠드는 소리들은
모조리 지워 버렸어
처음엔 내 살아온 삶부터 들추어 보았지
마음 가볍게 거슬러 되돌아가며
발 끝에 채이는 더러움쯤은 무시하고
마술의 날개 혹은 인형의 꿈을 되찾기로 하였지
흙모래 쏟아져 내리는 소리, 못박는 소리의
완벽한 어둠의 깊이 깊이 숨다가
문득 생각이 미쳤지
처음 와본 방인데 왠지 낯익은거야
그래서 온몸으로 정적을 껴안고
입술을 빨아보고 젖을 만져 보고 귓밥을 깨물어도 보았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끝내 알 수가 없었어
골치 아픈 문제는 통과하기로 하고
그냥 낯선 시간의 즐거움을 즐기기로 마음을 바꾸고
피의 굳어짐 , 살의 메마름, 뼈의 삭아짐을
지켜보면서
잘 모르는 삶이지만 익숙하게 팔짱을 끼기로 했지.
지옥.
피의 굳어짐, 살의 메마름, 뼈의 삭아짐을 지켜보면서
잘 모르는 삶이지만 익숙하게 팔짱을 끼기로 했지......
진정 그럴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 수 없는데, 이 곳에서 그렇게 나를 놓아둘 수 있을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삶을 둘 수 밖에 없는 지옥에서의 삶
시인은 그리 힘들었을까?
그리고 넘어섰을까?
그렇게 했을까?
찬양하는 시인보다는 아픈 시인이 많다.
아픈 시인의 시가 나의 마음을 더 울린다. 그리고 우리들 보편의 마음을 더 울린다.
사람들은 그리 아픈 것일거다.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천득] 소망 (0) | 2005.06.24 |
---|---|
[유수연] 중얼거리려고.6 (0) | 2005.06.23 |
[안도현] 연탄시 세 편 (0) | 2005.06.17 |
[김사인] 겨울 군하리 (0) | 2005.06.13 |
[이성복]시인이 얼굴과 그의 시 (0) | 2005.06.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