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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제3부

by 발비(發飛) 2005. 5. 19.
LONG

86. 봄눈 오래 녹지 않는

 

호랑가시나무를 본 적이 없다

호랑가시나무를 보아도 그게

호랑가시나무인지 모른다 그러나

보름전 아픈 어머니 고향에서

모셔와 아이들 방에 눕혀드리고

이따금 들여다보면 눈 덮인 호랑

가시나무 같다 드러누우면 근골이

땅겨, 하얀 솜이불 속에 웅크린

어머니, 어젯밤엔 하도 다급해

요에 이불에 한참을 토하고, 엄마,

그거 토한 거 아냐? 물으면

고개 끄떡이고 돌아눕는 어머니,

봄눈 오래 녹지 않는 호랑가시나무

 

 

87. 찬물 속에 떠 있는 도토리묵처럼

 

 

어느 여름 매미가 남겨놓은

껍질 같은 육체가

새로 들여온 삼백육심만 원짜리

통가죽 소파에 몸 가누고 있다

 

하루 종일 토하고 밤에는

잠 못 이루는 어머니,

찬물 속에 떠 있는 도토리묵처럼

말씀 없으시다가,

인제 겁 안 난다, 살 만큼 살았으니......

 

살얼음 긴 우물을 들여다보듯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들여다본다

 

 

88. 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

 

 

경남 충무나 고성 일대에서는 파리를 '포리'라 한다

'포리', 그러고 보면 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 초겨울

아파트 거실에 들어온 파리는 쫓아도 날아가지 않고,

날아도 이삼십 센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예의 반수면

상태로 빠져든다 '포리', 여든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한사코 택시를 타지 않으신다 마늘이나 곶감이 가득

든 가방을메고 그보다 더 무거운 사과 궤짝을 들고

버스 두 번 갈아타고 고층 아파트 아들 집을 찾으신다

때가 꼬지레한 바바리에 허리굽은 노인은 예전에

라면이나 풀빵으로 끼니 때우며 자식 공부를 시켰지만,

취미라고는 별것 아닌 일에 벌컥벌컥 화내는 것이다

땅 한뙈기 없는 집안의 삼대 독자, 백발의 아버지는

이제 할머니 제사 때도 목놓아 통곡하는 일이 없다

헛도는 병마게처럼 꺽꺽거리는 헛기침이 추진 울음

대신할 뿐, 요즘 아버지는 누가 핀잔해도 말씀이 없다

'포리', 지난번 묘사 때 할머니 산소 찾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힘에 부쳐 여러 번 숨을 몰아쉬다가 시동 꺼진

중고차처럼 멈춰 섰다 아내는 등 뒤에서 아버지를 밀어

드렸다 가다가 서고, 가다가 또 쉬고 얼마나 올랐을까

산중턱 바윗돌에 앉아 가쁜 숨 몰아쉬는 아버지의 뺨에,

거기까지 따라온 파리가 조용히 날개를 접었다

 

 

89. 이제는 힘이 빠진 날벌레를

 

 

어떤 밤에는 달이 하도 밝아

이부자리 거꾸로 하고

달을 보며 잠이 들었다

밤중에 목말라 깨면

아내는 달빛을 받고 있었다

달빛은 금실 은실

잠든 아내를 에워싸고

이제는 힘이 빠진

날벌레를 거미가 지키듯이

나는 숨결도 없는

아내를 오래 바라보았다.

 

 

90. 허벅지 맨살을 스치는

 

겨울 아침밥 먼저 먹고

화장실에서 들으면

아이들 숟가락 밥그릇에

부닺기는 소리,

먼 옛날 군왕의 행차 알리는

맑은 편종 같고,

군왕의 행차지나간 다음

말방울 여운 같고

어느 뒷날 상여 지나간 다음

내 묘혈을 파는 괭이 소리 같다

겨울 아침 아이들 숟가락

사기 밥그릇에 부딪기는 소리,

오줌 떨고 난 다음

허벅지 맨살을

스치는 오줌 방울처럼 차갑다

 

 

91. 수유에게 1

 

언젠가 내가 죽고,

네 엄마가 죽고

개구쟁이 오빠들도

할아버지가 되고,

 

네 흰 머리엔

옛날 내 할머니의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얼나나 앓았는지,

거울 앞에서

너를 닮은 할머니

까박까박 졸고 있었다

 

먼지 낀 거울 속

새벽닭이 울고,

세상에 핏덩어리 너를

낳은 죄, 닭 벼슬보다 붉었다

 

 

92. 수유에게2

 

너의 생일 다음날 비가 왔다

비 온 뒤 아스팔트 고인 물을

성큼 뛰어넘으려 할 때,

그 얕은 물 속 푸른 하늘과

새털 구름을 타넘을 줄 나는

몰랏다 울렁거리는 내장이

먼저 흥분했고 한순간 발바닥이

뜨거웠던가 물 위에 흘러내린

무지개 기름띠, 하늘 홍예문에

내걸렸으니(아직은 네게 보여

주지 않을거야. 하늘 홍예문!)

 

 

93. 또 그때처럼 구두 바닥으로

 

아카시아 꽃잎과 빗물이

다져져 길이 되었다

그 위로 조금씩 흐르는

빗물은 아무도 씻어줄 수

없는 눈물이었다(어느 봄

중앙병원 혈액종양외과

병동 앞에서, 초로의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울고 있었다)

아무도 씻어줄 수 없는

눈물을, 나는 또 그때처럼

구두 바닥으로 짓이기고 있었다

 

 

94.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느냐고

 

 

새 학기에 고3이 되어야 할 여자아이는

머리 박박 밀고 입에 마스크하고 신승훈인가,

이승환인가 요즘 나오는 발라드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래, 노래라도 해라, 얘야, 노래라도

자구 불러라, 시어머니 병수발하던 옆 침대

아줌마가 중얼거린다 달포 전 아침부터 토하고

설사해 정밀 검사 받아보니 간에도 폐에도 암은

퍼진 지 오래여서, 그래도 그 엄마 울고불고

수술은 해야겠다기에, 거의 배꼽 근처까지 장을

잘랏다는 아이, 잣죽이나 새우깡 부스러기 먹는

족족 인공 항문으로 쏟아내고, 또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미치겠다고 제 엄마 졸라 매점 보내고

나서, 아이는 베개 한쪽에 뺨을 묻고 노래부른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느냐고,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6인병실 처음 들어오던 그날, 왜 내가 죽느냐고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그리 걻게 울던 그아이는

 

 

95. 추석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앂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 번 들었던가

 

 

96. 그 여자 돌아오지 않고

 

바냡스키의 바이올린 곡을

밤에 들으며

까치발로 서서 돌다가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한 여자를 본다

그 여자 돌아오지 않고

혼자서, 얼어붙은 강을 깨고 김 오르는 빨래

돌에 쳐댈 때, 희긋희끗 비누 거품처럼

퍼져나가는 것이 있다

멀리 가서는, 급히

벗어놓은 흰 속옷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다

 

 

97. 못에 낀 살얼음은

 

 

못에 낀 살얼음은

중국집 볶음밥 그릇을

덮은 투명 비닐이다

근처 호프집, 닭도리탕집

네온 불빛이 얼어붙은 못 아래

꽃 핀 사월의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어도

뒤틀리고 갈라터진 떡버들의

복통은 그치지 않는다

 

 

98. 빨간 열매들

 

빨간 열매들,

멀리서 보면 시멘트 바닥에 엎질러진

김치 국물 같다

가까이 와보렴, 하고

바람이 손  흔들기 전에는

(바람은 아파트 단지 보일러 굴뚝에서

연기를 만졌나 보다, 검다)

빨간 열매들, 요즘

아홉시 뉴스 앵커들 옷깃에 달린

브로치를 닮았다

시든 잎새라도 있었으면 춥지 않았을 것을

 

 

99. 돌의 초상

 

도래 닳아 부드러운 돌은

한가운데 저를 닮은 입을

한껏 벌리고 있지만

아무것도 씹은 흔적 없고,

뒤에는 말할 수 없는 균열이 있어

칼끝이 지나간 선사 시대 두개골을 닮았다

그러나 또 돌려 세워놓고 보면

저를 배닮은 입가의 잔잔한 반점들이

혼숙과 난교의 아픈 밤을 보낸

미성년의 신발들 같다

 

 

100. 벽지가 벗겨진 벽은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툴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101. 마지막 갈 길 까지

 

굶주림이 남긴 자취

저리 투명하다니

한사코 굶주림에

파먹히지 않았다면

저리 섬세한 망사가

드러날 수 있었을까

마지막 갈 길까지

다 파먹은 벌레는

다슬기 속살처럼 푸른

제 똥을 내려다본다

 

 

102. 싸움에 진 것들은

 

이른 아침 모과나무 잎새가 떨어져

내리고 잔가지 부러지며 외마디 소리

지르는 것은 그 속에서 일방적이지만

않은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드시

선하거나, 선하지 않은 싸움은  없다

이겨서 가쁜 숨 몰아쉬는 것에게나,

일찍이 싸워본 적 없다는 듯 나가

뻐드러진 것에게나, 못다한 분량의

섹스와 쉴 새없이 입질해줘야 할

성마른 새끼들이 있다 이른 아침

모과나무 잎새와 잔가지들 고요할

때면 싸움에 진 것들은 이긴 것들의

혀 밑에서 단 침이 되어 흐를 것이다

 

 

103. 진밭골의 개들

 

 

아직 어린 것들이 진흙밭에서

달리며 넘어지며 마구 올라탄다

흙투성이 털에 겨울바람 끼얹으며

훌쩍 올라타서 제 몸 일부를 끼워]

넣으려고 발버둥이다 제 몸 일부를

빳빳이 세워 마구 펌프질하는 것들,

제 몸 일부가 아니라 제 몸 통째로

쑤셔 넎지 않으면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가 무슨 까닭에 너희는

진흙 천국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냐

 

 

104.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바진 자국 찾아 들어갓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105.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보닛이 열린 자동차 밑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껏 머리를 밀어 넣고,

기름때 묻은 손을 뻗어 더듬고 돌리고

비틀어보는 것이다 냉각수가 떨어져

머리카락 적시고 엔진오일에 러닝셔츠가

젖어도 도대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 한껏 몸을 차대 안으로 밀어 넣고

몇 번이나 풀려고 애쓰던 볼트를 별 수없이

다시 조이는 것이다 농구화가 신겨진 그의

다리가 신문지에 얻어맞은 파리처럼 몇 번

경련하다 멎을 때, 초겨울 햇살이 미루나무

남은 잎새를 흔들고 살얼음 낀 붉은 고무

대야가 더럽혀진 그의 손을 기다릴 것이다

 

 

106.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곡으로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저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 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위을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107. 떡가루 같은 눈 쓸어올리며

 

잎 떨군 나무들의 그림자 길게 깔리면서

푸르름 가시지 않은 땅은 석쇠에 그을린

스테이크 같았다 그 뒤로 강, 처음엔 딸기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

강, 눈 덮인 겨울이면 냇가에 내다 버린 암캐

탯줄처럼 한없이 늘어나 때 묻은 속옷 아래

덜 아문 배꼽까지 닿아 있던 강이여, 돌아서

담배 한 대 피는 사이 풀풀풀 떡가루 같은 눈

쓸어올리며 너는 방패연 긴 꼬리처럼 천천히

떠올랐다 아니다, 칼바람 잦아들면 너는 눈썹

끝까지 솜이불 끌어올린 겨울날의 늦잠이거나

내장이 터진 어떤 생을 가리는 포대 자루였다

 

 

108. 이동식 방사선 치료기처럼

 

어젯밤 해는 뒷산 떡갈나무

아래 깊은 구덩이에서

고슴도치처럼 뒹굴다가

오늘 아침 굵은 설탕 묻힌

오화당 사탕처럼 떠올라

아스팔트 티눈 같은 사금파리

각진 보석으로 빛나게 하고

아침 산책 나온 지렁이 남매

자수정 목걸이로 변할 때까지

이동식 방사선 치료기처럼

잠시 더 머물 것이다

 

 

109. 쏟아놓은 이쑤시개처럼

 

솽주리에 씻어놓은 막창 대창처럼

세상의 길들 안개 속에 가지런 ㅎ고

보아지 않는 담낭처럼 죽음은 혹독한

즙을 흘린다 이제 해가 뜨면 꽁치 굽는

냄새. 참외 물러터지는 냄새 축농증

앓는 코를 찌르고, 햇빛은 쏟아놓은

이쑤시개처럼 피 덜 마른 뼈다귀들과

함께 종량제 쓰레기 봉투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당신은 어디로 들어가려는가?

 

 

110. 여리고 성 근처

 

헐벗은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겨울 해가

기어내려오고 있다 통조림 캔에서 금방

꺼낸 복숭아 알을 닮은 해, 매연과 땟국물로

식사하고도 아프단 소리 한번 안 하는 해는

해마다 한 번씩 건강 진단 받는 것도 아니다

이제 미루나무 곡대기를 완전히 벗어난 해는

돼지 감자탕집 간판에 정수리가 찌기면서

뒤산 언덕에 벌건 핏국물을 퍼뜨린다 그 피

다 빠지고 나면 여호수아 교회 십자가에 네온

불빛이 들어오고, 메시아가 될 한 아이를 찾아

어둠응 헤롯의 군사들처럼 들쑤시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해는 내일 아침에도 예림 안마 시술소

뒤쪽 출입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여간해 찢기지

않는 낙타표 텍스처럼 해는 기어이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정액 흘러내리는 낙타표 텍스처럼

해는 풀죽어 시든 것들을 위해 눈물  흘릴 것이다

 

 

111. 어떤 풍경은

 

 

어던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걱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 같은 풍경.

묶인 굴비 일가족이 이빨 보이며

노래자랑하는 풍경

어떤 밤에는 젊으실 적 어머니

봉곳한 흰 밥과 구운 꽁ㅊ를

소반에 들고 들어올 것도 같지만.

또 어떤 대낮에는 '시집 못 간

미스 돼지'라는 돼지갈비집 앞에서

도무지 사람이라는 게 부그러워지는 풍경.

갈배 두 대와 된장 찌개로 배를 채우고

녹말 이쑤시개 혀끝으로 녹여도 보는 풍경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112. 석쇠를 엎어 놓은 듯

 

석쇠 엎어놓은 듯 갈라터진 촌노들의

손등이여 상하고 껍데기 까져도 의연한

국숫집 상다리여 상다리 사이사이

꼬부라진 음모 몇 개가 만드는 상징적

지도여 온몸이 슬퍼서 아플 데가 없는

무척추 동물의 한가로움이여 기억의

패총이여 패총에서 솟아오른 대숲이여

늘어진 돼지 불알의 힘없는 주름처럼

잔잔하고 그윽한 동곡의 저녁이여

돼지도 생전에 제 안뽕을 알았을까

 

 

113. 매화산 어깨 빠지도록

 

그곳엔 우리 십육년전부터

다닌 '네 고부 국수지'이 있고

언젠가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육만 원 뜯긴 '동궁다방'이

있다 우리가 비운 안뽕 접시만

해도 수미산이 될 것이다 동곡,

장터 길목의 살얼음 밟고 비틀

거리던 햇병아래와 , 여름 한철

다리 뻗고 잠자던 잡종 개들의

세월, 그대에게 봉헌하노니, 언제

우리 하빈 면사무소 앞에서 만나

매화산 어깨 빠지오록 기지개나

켜다가, 승천하기 직전 '네 고부

국수집'에 다시 들를까 일찍 배

꺼지는 국수의 담백한 맛과 달큰한

비게의 여운 혀 끝에 간직한 자,

누구나 신선 될 자격이 있다.

 

 

114. 동곡엔 가지 마라

 

당신이 동곡에 간다 하면 나는

말릴 것이다 동곡엔 가지 마라

그곳에 대구매일신문 '맛자랑

동네 자랑' 코너에 소개된 할매

국숫집이 있다 해도 가지 마라

할매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근처 처갓집 국수가 할매집보다

맛있다 해도, 백 배 천 배 맛있다

해도 가지 마라 눌린 돼지 머리와

안뽕을 내오는 외지인 아줌마가

텔레파시를 보낸다해도 동곡엔

가지 마라 그곳에 한번 가면 못

돌아온다 오일장 설 때마다 살 튀밥과

토끼 새끼 내다 파는 중절모 사내와,

식칼과 도끼 함께 벼리는 염소 수염

핣가, 삶은 황소개구리 육질을 

심심찮게 찢는 젖통 큰 과부를 두고

사랑 싸움을 벌인다 해도, 밤마다

그 과부 시뻘건 두툼한 입술로 당신

입에 뜨신 바람 불어넣어주겠다 해도,

가지 마라,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가지 마라, 다시는 당신 못 돌아온다

 

115.지진아와 자폐아의 싸움처럼

 

지진아와 자폐아의 싸움처럼

봄은 왔다 유채꽃 들판으로

망각의 코끼리가

뚜벅뚜벅 지축을 울릴 때

우리는 지난 겨울을 생각하며

추억 방제용 엄화나트륨을 뿌렸다

봄이었는데 꿈 많은 우리의 하초는

번데기처럼 쫄아들었고

우리의 눈동자 속에 다시금

뽀금뽀금 게 구멍 같은 빛이 일어

지독한 카리스마의 영덕 대게 형님을

찾아 나섰다, 봄이었는데

재래 시장 건어물 코너 참조기 세트

무슨 프로젝트라도 따려는 듯

한껏 입 벌리고 마른 침 흘리는 것

한 껏 기분 좋게 웃어주고,

한입가득 포르말린 냄새 내뿜어

간잽이 얼간잽이 생선들 겁도 주었다

형님 그곳에 오신지 오래였다

눈물 빗물 훌쩍이며 돌아오는 길.

동네 슈퍼에 들러

독거 갈비살과 소년 골뱅이들에게

진실한 용기 북돋워주었다

세상의 분노는 아우타기 한느

거라고 타이르면서

허파 뒤비고 잘 참으면

허파 뒤벼질 날 꼭 온다고

고구정녕 타이르면서

 

 

116. 국밥집 담벽 아래

 

겨울 오후 국밥집 먼지 앉은

비닐 장판에 미끄러져 들어온

햇빛, 선팅한 유리 창살 격자를

죽은 듯이 눕혀놓는다 아침부터

테니스 치고 땀에 쩔어 들어온

국밥집, 오늘 하루도 벌건 국밥에

썰어놓은 대파같이 잘도 익었구나

소주 한 병에 여섯이 달라붙어,

구이집 마담의 무성한 거웃이나

재혼한 친구마누라 탱탱한 궁뎅이

감탄하다가, 비틀거리며 국밥집

나올 때면 부끄러워라 국밥집 담벽

아래 바르르 떠는 참대나무 앞에서

그만 얼굴 폭 가리고 울고 싶어라

 

 

117. 그날 우리를 우록에서 놀았다

 

십만 원이면 사슴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우록에 갔다 동네 테니스회 야유회 날이엇다

모자를 눌러스고 쭈그리고 앉은 사내들 운명적

대어를 꿈꾸는 유료 낚시터를 지나, 빠듯한 외통수

길을 따라갔다 맑은 물 흐르는 시냇가에 봄풀을

뜯는 염소들 뾰족한 입에서 흰 이빨이 빛났다

 

마리당 이십만 원에 두 마리를 잡았다고 회장님

말씀하시자 모두들 기립 박수를 했다 미리 연락

받고 상 차려놓은 터라, 손 씻으로 수돗가에 갔다

비누와 수건이 놓여 있는 그곳에 아직 치우지 않은

식칼과 도마가 있었고 군데군데 염소 수육이 흩어져

있었다 수육의 살점이 성기 속살처럼 거무튀튀했다

 

그날 우리는 해 질 때까지 우록에서 놀았다 양념한

염소 고기 숯불에 구워 뜯으며 흘러간 옛 노래를

힘차게 불렀고 노소동락 뚱뚱한 배와 흐벅진 엉덩이

흔들며 요즘 가수들의 춤사위도 잘도 흉내냈다

나도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예술가는 과연 다르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염소의 피냄새가 입 안에 그득했다

 

118. 멍텅구리 배 안에선

 

밤의 별들은 남지나 해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키 선원들 같다 지금도 신안 앞바다

어디쭘 새우잡이 배를 타고 있을 젊은이

몇이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있을지 모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잇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 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 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밤의별들 몸 던지는 유원지 못가에 낚시꾼들

갖은 미끼로 물고기를 괴롭히고, 우거진 덤불

숲 황금거미 한 마리 홀로, 거룩히 빛나신다

 

119. 제가 무슨 아리따운 소녀라고

 

동네 뒤산의 아카시아 나무를 제일 많이

괴롭히는 건 꼬부라진 영감 할매들이거나

중풍으로 비칠거리는 초로의 사내들이다

일종의 원한, 생이 충만한 것들에 대한

복수같은 것일까 어떤 할 매는 웬 힘이

치솟는지 아예 어린 나무에 올라타고 앉아

가지 끝이 질질 끄이도록 잡고 누른다

그리고는 제가 무슨 아리따운 소녀라고

두 손 입가에 모으로 가래 끓는 소리로

야-호- 깨금발 뛰며 열 두발 상모 같은

메아리 날리고 비틀비틀 언덕을 내려간다

허리에 잡아맨 카세트 라디오로 경쾌한

아침 음악 들으며, 덕분에 언덕배기 어린

아카시아는 올 여름 못 넘길 것 같다.

 

120. 찔레꽃을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

 

웬 미친놈이 학교 가는 사내애에게

황산을 끼얹었다

아이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푸른 잎새 넘실거리는 보리밭에서

깜부기를 뽑을 때처럼

삶은 난감한 것이다

 

삶이란 본래

시골 마을 질 나쁜 녀석들이

백치여자아이를 건드려

애 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만

 

찔레꽃을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

백치 여자 아이는

눈부신 돛배처럼 내 앞에서 놀고 있다.

 

121. 좋긴 한데, 쪼끔 부끄럽다고

 

수많은 젖을 늘어뜨리고

젖 빠는 새깨들 먼 눈으로 외면하는

늙은 암캐, 한 때 생은 그렇게 나에게 그랬던 것일까

 

출러이는 젖통 때문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수퍼 젖소의 골반에도

더러 나의 생은 머물렀는가

 

뼈다귀에 남은 힘줄을

한사코 가위로 잘라내던,

갈비집 제복 입은 아가씨의 굵은 팔뚝에

단옷날 그네라도 매고 싶었던가. 나의 생이여

 

족정 깊은 생이여.

여느 궂긴 동네 잔치판 빼놓지 않는 마당발이여,

빠닥한 만 원짜리 몇 장 입에 물고

좋긴 한데, 쪼금 부끄럽다고 호호 웃는 돼지 머리여

 

122.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 하면서

 

애를 배려면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대개 면 단위 촌동네에는 좀 모자라는

여자 아이 한둘은 있어. 빵그랗게 부푼 배로

가을 들판을 헤매기도 한다 동네 질 나쁜 젊은

녀석들이 사탕 몇 개주고 단체로 올라탄 것이다

 

배가 부푸는 데는 짝짓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 동네 체육공원에서 잘생긴 수캐 한번

붙여주고 십만원ㅆ기 맏는 흐뭇한 사내들도 있지만

동네 나들이 한번 잘 봇 나갔다가 저보다 큰 개들

임신한 것보고 저도 몰래 입덧하는 발바리도 있다

 

한번 배가 부풀면 잘 먹고 많이 먹어야 한다 제

팔뚝만한 메기를 고아 첩첩 비닐 팩에 넣어 임신한

아내에게 먹이는 착한 신랑들도 있지만, 한밤중 곤히

잠든 딸아이의 팔뚝에서 지치도록 피를 빠는 것은 모기

암컷이다. 공짜 짝짓기에 열 올리는 수컷은 여가가 없다

 

그러니까, 저 많은 암컷들의 배는 하늘의 달처럼

구령도 없이 부풀고 꺼지고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저 많은 암컷들의 고단한 배처럼 하늘의 달도 구령

없이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하면서, 노란 알 덩어리

하나씩 물 위에 떨어뜨리고 구름 속에 잠드는 것이다

 

123.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으 건져먹는

내 모습도 보고 싶어서엿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세퍼트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는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때까지

주도록 얻어맞앗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바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돠 동물 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임신이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124. 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창밖을 바라보는 개의 뒷모습

축 처진 귓바퀴에

굽은 등뼈가 산허리를 닮은 개

두 겹의 배가 뒤에서도 보이고

펑퍼짐한 엉덩이가 무거운 개

 

개는 붉은 의자에 올라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창밖엔 흰 구름이 브래지어 끈처럼

걸쳐 있고, 하늘은 푸르다

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개가 돌아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곳이

당신 방이라는 것을 아는가

대체 개의 머리는 바라보는 일에 무력해서

저렇게 비스듬히 세워진 몸뚱어리가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개의 위돠 식도와 창자가

고무호스처럼 포개어진

누르스름한 물컹한 다라리 같은 개의 뱃집이

창밖의 풍경을 빨고 삼키고 주물텅거리며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는 거칠고 표독하거나

신경질적이지 않다

개의 불룩한 배와 축 처진 귀가

그렇게 일러준다

하지만 곧추세운 개의 허리는

개의 의지가 우둔하고

완강하고 뻔뻔하게 그의 삶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장이라도 당신은 다가가

쓰다듬어주고

반들반들한 털 속으로 손을 넣어

긁어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당신의 몸집보다 두 배는 굵은 개가

당신이 앉은 붉은 의자에 죽치고 있을 때

당신은 개를 불러 내려오게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다

퍼질러 앉아 휴식을 취하는

개에 대한 예의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개가

당신 앞에 웅크리고 있는 개가

당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 구름이 브래지어 끈처럼

내걸린 창가에서, 이해할 수 없는 푸른 하늘 앞에

당신의 일부가 저렇게 버티고 잇는 것을

당신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부가 불가사의한 풍경 앞에

난해한 오후의 햇빛 앞에 바보같이,멍청하게

일어날 주 ㄹ 모르고

도대체 일어서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기 땜눙디다

 

당신은 메리, 메리 혹은 쫑, 쫑하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개를 부르지 못한다

볼펜이나 담뱃갑을 집어던질 수도

ARTICLE

[아, 입이 없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이다.

작품량이 많아 두드리는 것이 시간이 걸리지만, 아주 천천히 모두 두드릴 생각이다.

아마 반정도 두드린 것 같다. 좋으니까 한다.

 

제3부 진흙천국

 

83. 손톱으로 북 긁으면

 

아침에 깨꽃 붉은 꽃잎이 떨어질 힘도

없이 알루미늄 새시 틈에 말라붙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헤집고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진눈깨비 올 거라는 예보를 무시하고

푸슬푸슬 비내리고, 한길엔 중풍 들린 사내

더디게 게걸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육점에서

소 뼈다귀 사서 허리 다쳐 몸져누운 어머니

찾아가는 길, 손톱으로 북 긁으면 슬레이트

낮은 지붕위로 깨꽃 붉은 꽃잎이 묻어났다

 

 

84. 그것들 한번 보려고

 

 

서울 매제가 일하는 병원에 어머니 입원시켜

드리고 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설 때

눈앞에 돌연 겨울 흰 꽃들, 나무도 갈대도 가시

덤불도 설화석고다 산호초처럼 움직이는 거것들

너무 아름다워......그것들 한버 보려고 사람은

사는 것이다 그것들 한번 보고는, 오줌 눈

뒤처럼 몸 부르르 떠는 것이다. 겨울 흰 꽃들

 

 

85.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1998년 1월 2일 선산에서 상주로 통하는

25번 국도에서 개나리 덤불이나 관목숲

하다못해 갈대까지도 성에로, 서리로

하얗게 코팅한 상태에서, 감 홍시 같은

해는 안개 낀 하늘 위 데구르르 굴러

내 차 유리창 앞에 딱 붙어 섰는데, 그것들

너무 아름다워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왜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아름답다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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