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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한강] 눈물상자

by 발비(發飛) 2024. 12. 28.

 
도서관 자료 열람실 마감시간이 되어 나오는데, 누군가 반납해 놓은 한강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눈물상자]가 있었다. 
동화인데다가 얇아서 한강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얼른 읽어볼 수 있겠다 싶어 대출을 해서 휴게실에 앉아 책을 폈다. 
 
눈물, 이제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눈물'이다.
소녀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고인다. 
꽃이 펴도, 햇살이 따뜻해도. 누군가를 만나도.
눈물 장사를 하는 아저씨는 소녀의 눈물을 순수한 눈물이라고 한다. 
순수한 눈물을 구하러 소녀를 찾아왔지만 소녀는 눈물의 결정체를 보고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소녀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슬픈 일이라 그 곁에서 맘껏 웃을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눈물아저씨를 따라 눈물이 필요한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난 이제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내 눈물의 마지막은 아마도 스페인 북부 해안도시인 리바데오의 작은 성당에서 였을 것이다.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 들 사이에 끼어 미사를 드렸는데, 눈물이 그야말로 폭포처럼 흘렀다. 그 때 입은 베이지 색 바지 선명하게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옆에 앉으셨던 할아버지가 자꾸 쳐다보셨는데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그저 울었다. 그때 그 눈물에는 온도가 없었다. 그 이후 간혹 눈물이 날 때도 놀라울 정도로 눈물이 차갑다. 나는 아마도 리바데오 이후에는 울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많이 울었네.
그것도 눈물이라면, 나는 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었던 눈물은 눈물이라기보다는 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모르겠다. 
 
아이는 눈을 빛내며 상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주황빛이 도는 이 눈물은 화가 몹시 났을 때 흘리는 눈물...... 회색이 감도는 눈물은 거짓으로 흘리는 눈물...... 연보랏빛 눈물은 잘못을 후회할 때 흘리는 눈물, 진한 보랏빛 눈물은 부끄럽거나 자신이 미워서 흘리는 눈물, 검붉은 눈물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할 때 흘리는 눈물...... 분홍빛 눈물은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 연한 갈색의 눈물은 누군가 가엾다고 느껴질 때 흘리는 눈물이란다."
"연한 연두색 눈물요?"
"아기들의 눈물이야."
"그 뒤에, 조금 진한 연두색 눈물두요?"
"아니, 그건 엄마들이 아기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야."
"그럼, 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푸른빛 눈물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야.
 
한강은 눈물의 종류들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눈물의 종류는 이렇듯 많지. 더 많지. 얼마나 많은데, 눈물을 잃어버렸다. 
전 재산으로 눈물을 산 할아버지처럼, 
두 살 이후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그림자조차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싶어했다. 해결하고 싶어하셨다. 
각종 눈물을 결정체를 먹고는 평생 겪었을 오만가지 일들, 눈물을 흘릴만한 일들을 기억해내고, 그 때 흘리지 못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집을  떠난다. 
 
해결이 되면 떠나는건가?
해결을 하기 위해 떠나는건가?
 
숨겨진 눈물은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꽤 오래 전에 한 저자와 함께 꽤 유명한 역술가와 인연이 있다며 함께 간 적이 있었다. 그 역술가도 책을 쓴 저자였기에 이래저래 핑계삼아 간 거였다. 
함께 갔던 저자분이 나의 점괘를 봐달라고 역술가에게 부탁했다. 
내 사주를 넣고, 관상을 살피더니, 그 분은 관상으로 베스트셀러 감수를 했다. 이러저러하게 이런 저런 말들을 하고는 그 말들 끝에 
"이 이는 가슴 저 안에 차돌이 하나 있어, 절대 깨지지 않은 단단한 차돌. 그거 딱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
내 안에 차돌이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부처들에게 있다는 사리가 살아있는 몸에서도 알아채지는 건가 생각했다. 
 
숨겨진 눈물을 그 가슴 가운데에서 점점 진해지고 단단해지는구나. 
 
이 말이 그런건가? 
내 안에 있다는 차돌은 밖으로 내뱉지 못한 눈물이 단단히 굳은건가? 
그 색은 뭘까?
한강은 모든 색이 가진 눈물을 순수한 눈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햇빛아래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물.
 
언젠가 내 눈물샘도 그림자 눈물샘처럼 녹아 흐를거라고, 나와 그림자가 함께 울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믿어.
나와 그림자가 함께 흘리는 눈물, 너와 내가 함께 흘리는 눈물,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흘려야 할 때 흘리는 눈물, 
몹시 슬퍼하는 누군가에게 위로할 때, 실컷 울어라도 토닥여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연습하면 언젠가는 그림자와 내가 함께 시의 적절하게, 부족하지 않은 눈물.
 
그것이, 
 
때때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구하러 오는 눈물에 감사한다 
 
적어도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는 순간, 눈물이 나를 구원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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