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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무장해제

by 발비(發飛) 2022. 12. 18.

어쩌면 처음부터 견고하지 않았다. 

 

물컹물컹한,

액체에서 고체가 되기 전 어느 사이 

젤리처럼,

사람이 되기 전 

양수에 갇힌 태아처럼,

 

나는 견고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흘러가는 시간에 덮히고

아무데서나 부는 바람에 덮히고

시도 때도 내리는 비에 젖어 

스스로 굳지 못한 태아의 몸을 에워쌌다. 

 

몸에 덧대어진 이물들이 몸인듯 단단해졌다. 

딱딱한 몸

내 것이 아닌 몸

 

나는 견고한 적이 없었다.

 

26. 바람직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라. 사려깊은 사람들은 우아하고 품위있는 다독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시대를 풍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적절한 지식을 갖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범상한 방식이 아닌 교양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재치있는 언변과 고상한 행동을 현명하게 비축해 두었다가 적절한 시가에 사용할 줄 안다. 흔히 좋은 충고는 사뭇 진지한 가르침보다는 재치있는 말 한마디로 더 잘 전달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겐 대학의 어려운 학문보다 알기 쉬운 교훈이 더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학의 학문이 자유정신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세상을 보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저, 쇼펜하우어 편 중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뒤적이다가 무장이라는 말에 꽂혔다. 무장이 주는 단단함에 대해 생각이 머물렀다. 철통을 뒤집어쓴 것처럼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에 정말 나는 철통처럼 단단했을까. 답답한 것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배우고 익힌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이 시간쯤 되었을 때는 더는 배우지 않고, 읽지 않고도 삶이 이해가 되었을까? 삶의 이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노병사, 희노애락애오욕 알겠다.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삶이라는 것을, 신에게 기도하고, 전생과 이생의 수레바퀴에서 해탈하기를 기도하고, 아버지는 어떻게 죽음에 가 계실까? 오빠는 어떻게 죽음에 가 있을까? 괜찮을걸까? 아무것도 아닌걸까? 카뮈의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으리라]는 책이 없다. 수백권의 책을 없애면서 없앴나보다. 하나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의논하고 싶은데.... 흐물거리는 몸과 함께 모든 것이 흐물거린다. 서지도 않지도 못하고 떠 있었던 태아처럼.

 

"BORN B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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