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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by 발비(發飛) 2016. 9. 26.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신뢰할 수 있는 맑고 느린 말투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부적응하는 자의 피로를 묘사하는 소설과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나는 빨래를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국수를 끓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잠을 잘 못자는 사람입니다. 나는 걷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나는 술을 마시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명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렇고 그런 생각들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나는 양파를 먹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겁고 가벼운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나는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격렬하게 지우는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에 진지하고 사소하게 답하는 사람입니다. - 허락받지 않았으므로 밝힐 수 없는 작가의 글


이러면 안되는데 말이다. 


혹 누군가가 이글을 올린 작가의 신원을 밝혀 저의 절도를 고발하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난 분명 절도를 한 것이므로 벌을 받아도 싸다. 처음에는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에 꽂혔는데, 

그래서 나도 이 말끝에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좀 더 버텼어야 했는데, 그만 그의 글을 모두 읽고 말았다. 


읽고 나서는 나도 그런데, 나도 똑같은데, 


그래도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 손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좀 더 노력을 했었어야 했는데, 집에 가고 싶어서 생각을 이어갈 수 없다. 


아홉시다. 

어쩌다 보니 JTBC뉴스도 놓쳤다. 

이정현대표가 무기한 단식을 한다는데, 거참 그 또라이를 손석희는 뭐라하는지 봤어야 하는데, 못 보고 아홉시가 되어버렸다. 


오후내내 15권의 소설을 쓴 작가의 소설 목록을 정리했다. 

일곱개가 넘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고, 전자책이 나온 소설도 있고,

안 나온 소설도 있고, 절판된 소설도 있고, 개정판이 나온 소설도 있다. 

그의 소설을 분류하며 그가 20년 가까이 온 한 길 삶을 생각한다. 


그는 고맙다고 한다. 

내가, 아직 한 것도 없는데, 신경써 줘서 고맙다고 한다. 

일이 잘 될 때 고맙다고 하라고 했더니, 

잘 되어도 안되어도 고맙단다. 


그 말이 더 아리다. 


잘 되어도 안되어도 고마워서는 안된다. 

내가 사는 세상은 잘 되면 1분간의 칭찬을 하고, 잘 안되면 한달간을 괴롭히다가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틀안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잘 되어도 안되어도 고맙단다. 

그런 건 아닐텐데 말이다. 


그의 소설을 분류해서 전자책대행으로 계약할 것과 2차 사업대행으로 계약할 것과 디지털콘텐츠계약할 것으로 나누어 그와 계약을 하면, 

그의 20년 소설이 거의 모두 나와 유관하게 된다. 


무서운 일이다. 

한 사람이 20년이 다되도록 올곧게 바쳐온 소설이 모두 내 곁에 왔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신뢰할 수 있고,

느린 말투의 물음에 나는 부적응자의 피로를 묘사하는 소설과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상을 산다는 말을 구구절절하는 위의 작가와 다르지 않는 작가다. 심지어 닮아서 서로 친한 사이다.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작가들 곁에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차마, 읽지 않은 작가의 소설을 옆에 두고 오후 세시에 순대를 몰래 먹고 왔다고 말을 하기가 좀 그렇다. 

차마, 일요일에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을 넋놓고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는 물음에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무지하게 해야 하는 나는 그의 글을 절도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구구절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차라리 그의 글을 절도하였다. 

이렇게 마구 두드리는 사이에도 내 변명은 구체화되지도, 견디지도, 애쓰지도, 못하고 지금을 넘기도 만다. 


이러면 안되는데, 나는 또 그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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