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서酷暑 피서避暑
역시 나는 무기력에 빠졌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금요일 밤 챙겼던, 원고와 해야 할 일들을 꼼꼼이 적은 메모장, 단 한번도 펼치지 않았다.
더위 탓이야.
추위는 견디기 힘들어도 더위는 언제나 괜찮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는 여름을 지내면서도 선풍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아 독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못 견디겠다. 몸이 이상해진건가, 노화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때문인가. 몇 번 다녀온 상하이때부터 더위를 이상하게 못 견디게 되었다. 그곳의 습한 더위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괴로움이었다. 그 출장을 다녀온 후 몸의 리듬이 깨져서 영 아웃이다. 내 영혼은 그때 탈출하여 다시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서울도 상하이처럼 이상하게 덥고, 이렇게 내 게으름에 대해 이유를 붙이기 시작하자 이 게으름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래.
에어컨이 안 온다.
주문한 에어컨은 9월에나 온단다. 에어컨의 실외기가 베란다나 베란다 난간에 걸려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항상 답답했다.
일년에 며칠을 켠다고, 커다란 쇳덩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괴로웠다. 모든 매달려있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6년 전 이사를 할 때 버리고 온 에어컨을 그리워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기만 해도 좀 시원한데, 나는 현관문을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에어컨이 필요한데, 안 온다.
가을학기 수업계획안, 원고 검토, 제안서, 중국에 챙겨서 보내야 할 작품 관련 서류
꼭 해야 할 일이지만, 이틀 동안 나는 내가 언젠가 꿈꾸었던 19세기 여자처럼 시간을 보냈다.
금요일 이른 퇴근길에 만난 노점 할머니 덕에 우발적으로 사온 붉은 고추, 양파, 오이, 부추, 토마토, 이것들을 모두 섞어 내 멋대로, 듣도 보도 못한 김치를 만들었고, 베란다 붙박이장 깊숙히 들어있던 미싱과 천 조각들을 꺼냈다. 내키는대로 색도 크기도 모두 다르지만, 무조건 네모모양을 만들어 가스렌지 덮개도 하고, 제습기 덮개도 하고, 공기청정기 덮개도 하고, 전자렌지 덮개도 하고, 수저 받침도 했다. 길이가 길어 답답했던 앞치마의 길이를 자르고, 자른 밑단으로는 어디에 쓰일지도 모를 끈을 만들었다. 기성품이라 부실한 박음질을 다시 박았다. 언젠가 엄마에게 얻은 베틀로 짠 삼베와 무명조각천을 이어붙여 베개덮개도 만들었다. 외할머니가 베틀로 짜셨다는 고운 무명 귀서리에는 가는 붓으로 혜정이것(우리 엄마 이름이 혜정이다)이라고 적혀있었다. 아, 이게 베틀로 짠 거라고 했지, 손으로 짰다기에는 너무 곱다. 그 무명 조각은 한켠에 잘 두었다. 외할머니의 세필 붓글씨도 무명처럼 곱고 단아했다. 내가 그 외할머니를 닮았다면 좋았을텐데, 나는 분명 단아하지 않다.
티비를 이틀 내내 틀어두었다.
이쁜 것은 언제나 옳아서 좋아하는 닥터스와 W는 놓친 편을 보았고, 몇몇 대사에서 공감 200%였던 끝에서 두번째 사랑을 보았고, 아, 정말, 이 정도면 딱 좋아, 잘 썼다, 하면서 청춘시대를 보았고, 전도연과 유지태 둘 다 별로지만 굿와이프를 보았고, 다 끝나가니까 하며 아무도 변하지 않는 가화만사성도 보았고, 좋은게 좋으니까 하면서 아이가 다섯도 보았고..., 윤미래 때문에 판듀를 보고 엉엉 울었고, 배드민턴 국가대표였다는 키 크고 싱거운 해설위원이 나오는 1박 2일은 몇 번이나 빵 터지며 보았고, B티비 영화소개채널에서 하정우의 영화에 대해 소설가 김중혁과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소개하는 것도 보았고, 홈쇼핑을 보며 열개 정도의 물건을 주문했다가 전동공구셋트와 실내운동기를 빼고 8개(옷이거나 가방이거나)를 한꺼번에 취소했고, 이것들의 두배 세배만큼 많은 기억나지 않은 티비 프로그램들을 보았다.
만 이틀만에 찜통 같은 집을 나왔다.
현관을 열자 한강바람이 시원했다. 중국 남자처럼 의자를 현관 밖에 갖다 두고 앉아있을 걸 바보같았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러기엔 우리의 이웃은 무서움의 대상이지, 6년이 되었지만 양쪽 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너무 시원해서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와 지난 주 내내 현관에 쌓아두었던 재활용품들을 분리수거하고, 택시를 타고 회사로 나왔다. 지각도 아닌데 택시를 탄 것은 더위에 지치기 싫어서였다. 요즈음은 회사 출근길에도 택시를 탄다. 한달만 그러자 하고 그런다. 부자가 되기는 글렀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늙어서 가난한 독거노인이 되기에 딱이다. 그런데도 그런다. 그런데도 그러고 싶다. 20킬로 배낭을 메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걸었던 산티아고길과 고산증에 시달리면 올랐던 안나푸로나, 온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을 다 찾아드는 자이살메르 모래바람도 웃는 얼굴로 잘 걸었는데, 지금 나는 걷고 싶지 않다.
그들을 생각한다.
안 되는 것, 금기를 하고야 마는 것이 인간이다. 안 된다는 것은 안 하는 것(절제)이 인간이다. 나는 이렇게 두 가지로 규정되는 인간 중에 어떤 인간인가? 인간은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은 결국 혼자인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로 규정되는 인간관계 중에 나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인가? 두 가지 중에 일관성있는 선택은 아니었더라도 선택의 결과가 내게 어떻게 왔는가? 무엇으로 왔는가?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간 라르고는 일정 경계를 두고 아래 음역이면 무음이고, 그 위 음역이면 소리로 전해진다고 음향기기에 쓰이는 노이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라르고는 우리의 대화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어야만 침묵, 무음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블루투스 통화에서였지만 말이다. 라르고가 떠난 뒤 만난 그들은 라르고를 보내기 위한 씻김굿 같은 거였다. 그의 마음을 알았지만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이 없었던(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그의 말과 행동만을 훔치듯이 마음에 담아 내 이야기 속에 그의 아바타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안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더 미안했다. 나는 그를 마음에 담지 말고 안아주었어야 했다. 나는 라르고가 떠난 뒤에야 마음으로 몇 번이고 안아주었다. 그들에게 마음이 갔다. 마음이 가면 안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무음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노이즈 경계 바로 아래만큼 안았다. 그래서 나의 노이즈 필터에 그들이 걸러져 무의미해졌으며, 그들의 노이즈필터에 내가 걸러져 무의미해졌다. 서로 무의미한 사람이 되었다. 그만큼 우리들의 대화는 은밀했고, 우리들의 행동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므로 무음, 무의미가 되었다.
나는 무음을 견딘다. 무의미를 견딘다. 말하였으나 의미가 되지 않고, 움직였으나 의미가 되지 않은 이 시간을 견딘다. 이 더위를 견딘다.
심기일전心機一轉, 마음의 틀을 한 번 (으샤) 뒤집는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챙겼던, 원고와 해야 할 일들을 꼼꼼이 적은 메모장을 연휴 마지막 날 회사 책상에 앉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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