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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경주] 무릎의 문양

by 발비(發飛) 2014. 12. 15.

무릎의 문양

 

김경주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 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으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된다면 이 시

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음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은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어제와 오늘 나는 무릎 생각에 빠졌다.

 

감각이 둔한 곳, 살이 없는 곳, 키높이를 정하는 곳, 덜거럭거리는 곳, 등산을 갈 때 고민하게 되는 곳, 가장 먼저 꺾이는 곳,

몸의 아랫쪽에 있는 것, 흉터가 집중적으로 모인 곳, 흔들면 흔들리는 곳, 접어도 펴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곳, 누군가의 베개가 되는 곳,

긴 버스여행에 가장 불편한 곳, 그에게서 본 기억이 없는 곳, 굳은 살이면서 타인의 것과 닿으면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 무늬가 있는 곳,

몸의 진행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곳, 복종과 굴복이 상징인 곳, 발음을 해보면 겸손해지는 곳, 끝말잇기의 종결자, 기도하는 곳, 사막의 낙타가 꿇는 곳, 웃을 때 치는 곳, 깜짝 놀랄 것을 발견했을 때 치는 곳, 딱 맞을 때 치는 곳, 몸의 나이를 가장 정확히 아는 곳...

 

또 뭐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무릎에 대해 생각한다.

그와 내가 마주 닿았던 무릎에 대해, 그 시간에 대해, 그 온도에 대해, 그 기억에 대해, 이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층을 달리하며 꺾여버린 시간은 시간으로서 존재하는지에 관해 추적하려 한다. 시간의 무릎.

 

 

---

김경주 시인의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 [밀어] 중에 무릎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냈는데, 다시 꼼꼼이 읽고 보니, 무릎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나열한 것들이 시인의 문장으로 이미 멋지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야!

어쩌면 무릎이라는 단어가 문득 내게 온 것은, '무릎'이 김경주 시인의 시와 문장에서 태어나 무릎과 함께 등장하는 새가 물어다 내 몸 어디엔가 박아두고 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잉태한 말의 씨앗,  노루벌은 노루의 몸 속 자신의 알들을  낳는다고 했다. 노루는 벌의 알들이 부화될 즈음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벌을 낳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릎'은 내게 고통과 함께 새로운 무엇을 생산해야 할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 이 번거로운 생각의 시간을 보낸다면,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내게 나타날까 싶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새들이 저녁의 가지에 앉아 부어오른 자신의 무릎을 핥고 있는 것을 오래 바라보겠다는 거다'  오래도록 바라보겠다는 거다.

 

무릎 - 모음의 연골

무릎은 살 속에 숨어 있는 마을이다. 무릎을 만질 때마다 마을은 살  속에서 동글동글 움직인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무릎 속에 존재하는 이 마을이 몸에서 조금씩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믿고 사는 편이다.

생리학적으로 무릎은 연골들로 이루어진 우리 몸의 작은 부위에 해당하지만 무릎이라는 단어를 몇 번만 천천히 발음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무릎이라는 단어 속에도 아주 작은 연골들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모으에 해당하는 음성(ㅜ,ㅡ)의 '미미한' 사이가 자음(ㅁ,ㄹ,ㅍ)의 '형형한' 체언으로 들어와 '무릎'이라는 발음 속에 음성의 연골을 생성하는 것이다. 언어들의 연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연음현상이라는 것을 주목할 때 단어가 의미의 세계에 닿기 전, 말의 리듬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언어의 해발이라는 것이 있다.

그 해발의 고도는 인간의 수와 통계로는 잘 드나들 수 없다. 무릎, 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무릎이라는 단어의 해발로 놀러 온 새들을, 문득 만나게 되는 것이다. 다소간 격차는 존재하더라도 '연음'은 나라마다 언어의 독특한 '모음의 골'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모음의 골에 해당하는 골짜기를 정확히 발음할 수 있을 때, 그 언어는 비로소 그의 모어가 된다. 그때 가서야 그 단어로 이루어진 마을의 주민이 된다.

무릎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 했을 때를 기억할 수 없을 지 몰라도 무릎이라는 단어를 아주 오랜 기간동안 발음하는 사람의 편에서 단어의 연골들에 무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는 저녁에 찾아오는 무릎의 멍을 문득,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볼러보고 싶어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무릎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해서야 사람들은 무릎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생리학적으로 '무릎을 버린다'는 말에는 더 이상 멀리 걷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저녁의 편에 서서 '무릎을 버리는' 일은 사라지고 연약한 것들을 명명하는 데 자신의 언어를 출현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새들이 저녁의 가지에 앉아 부어오른 자신의 무릎을 핥고 있는 것을 오래 바라보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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