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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서정주] 자화상

by 발비(發飛) 2013. 12. 5.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가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지금 '자화상'이 있는 원고에 분홍색 형광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어제는 말만하면 모두가 아는, 내가 참 좋아하는 시인을 만났다.

나는 피로회복에 좋다는 설명이 붙은 매실모히토를 시켰고, 그 분은 아메리카노 순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며 주문을 했다. 

때로는 시 이야기, 때로는 여자로 사는 이야기, 때로는 골백년전 이야기, 때로는 십년 후 이야기.

 

겨울 추위를 유난히 못 견뎌하는 나는 이 계절이면 뭘해도 몸이 아프고, 얼굴이 심하게 못생겨지고

딱 삶이 고단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영락없이 요즘 힘든 일이 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겨울 초입에는 원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이어졌고, ...시인의 이야기에 내가 호응을 하고,

내 대답에 시인은 이야기를 또 들려주셨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선생님... 하고 말이 숨처럼 새어나왔다.

누구나 지나가는 일 없고, 스쳐가는 일이 없는 삶의 구차함이 그분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시인과 서너시간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어두워진 광화문거리에서 손을 흔들고 등을 돌리는 시인을 다시 불러 가슴으로 안았다.

감사합니다. 힘이 되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나도... 하고 시인은 손을 흔들었고, 곧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눈인사로 마무리한다.

 

시인의 원고에는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 있었다.

참 오랜만에 읽어보는 서정주시인이 스무세살에 썼다는 유언과도 같은 시이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오늘은 이 구절에서 멈췄다. 바로 이 자리에 분홍색 형광포스트잇을 붙였다.

하얀 복사용지에 검은색 바탕체 위에 붙은 분홍색 형광포스트잇이 화사하다.

유언과도 같은 시가 화사해졌다.  삶이 화사해졌다.

 

화사............화사......

속 시원했던 화사........., 그 화사가 아니나, 화사가 연이어 생각난다.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내가 읽는 원고들은 나의 주인이 된다.

오늘 나의 주인은 이들이다.

 

며칠전 통화 중에 운명에 맡겨보는 것도 괜찮다고 하셨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의 운명은 남자를 바꾸며 사는 여자들이 억센 삶을 살듯 수

많은 원고들을 날마다 바꿔 읽으며 살아가는 억센 것일런지도 모른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은 영락없이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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