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중국영화를 20분 간격을 두고 연이어 보았다.
한, 중, 일... 최근 영화를 보면서 이 세 나라는 한 줄기의 문화와 역사가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차마 다른 문화권과는 위아더월드를 외칠 수 없지만,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물론 정치적이 아니라 그 나라들에게도 우리나라에도 살고 있는 그냥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5일의 마중]은 사실 잘 모르는 마오쩌뚱 시대의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굴절되어버린 개인의 삶을,
[황금시대]는 중국문학계의 황금시기라고 불리는 30년대말 활동했던 샤오홍이라는 여류작가의 삶을 영화화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중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이 배경이라 개인의 삶으로 보이기 보다는 거대한 움직임 속의 개인에 대한 생각이 절로 연동되었다.
그래서 두 영화 모두 먹먹한 마음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5일의 마중] 장예모 감독, 공리 진도명 주연.
무엇보다도 두 주연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햇빛에 어른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 손길, 몸짓 하나하나 눈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장예모 감독의 멈칫멈칫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오쩌뚱이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지식인을 말살하려했던 문화대혁명때 교수였던 남편 루옌이 신장까지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탈출...가족에게 돌아오고자 했던, 그 때 아내는 남편에게 선뜻 문을 열어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남편을 기억하지 못하고, 딸은 수석무용수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신고했고, 루옌은 다시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십몇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무죄판결로 가족에게 돌아온 루옌, 자신을 포함해 모두 몸과 마음이 누추해짐에도 잃지 않았던 아내와 딸에 대한 묵묵하고도 깊은 사랑, 그리고 이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미 늦어버린- 진정한 사랑과 이해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가슴 깊숙한 곳에 아직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해서 온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저 간절해지는 영화였다. [5일의 마중]에서 사랑은 15년이라는 긴시간을 묵힘으로- 아내에게 썼던 한 상자 가득한 편지를 보면 묵혔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렇지만 묵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치열한 사랑이 아닌 그윽함이 되었다. 깊고 먼 향으로 퍼지는 그윽함. 깊고 먼 향,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황금시대] 탕웨이 주연
영화는 강렬한 서사로 이어지지 않고, 간간이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서 이리저리 다른 생각들이 많이 났다. 내 생각도 하고, 주인공이 샤오홍과 같은 나이인 서른 한 살에 자살을 한 미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생각도 나고,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 생각도 났다.
거상
실비아 플라스
저는 결코 당신을 온전히 짜 맞추진 못할 거예요.
조각조각 잇고 아교로 부이고 올바로 끼워 맞춰,
노새 울음, 돼지 꿀꿀거리는 소리, 음탕한 닭 울음소리가
당신의 커다란 입술에서 새어 나아요.
그건 헛간 앞뜰보다도 더 시끄럽습니다.
아마 당시은 스스로스 신탁이나
죽은 사람들, 아니면 이런 저런 신들의 대변자로 생각하겠지요.
진흙 찌끼를 긁어내려고 애셨답니다.
그런데도 전 조금도 현명해지질 못했어요.
아교냄비와 소독액이 담긴 바케스를 들고 작은 사다리를 기어올라
저는 잡초만 무성한 당신의 너른 이마를 슬퍼하면서
개미처럼 기어 다녀요.
거대한 두개골 판을 수선하고
민둥민둥한 흰 고분같은 당신의 눈을 청소하려고,
오레스페스 이야기에 나오는 푸른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을 이루어요. 오 아버지, 혼자만으로도
당신은 로마의 대광장처럼 힘차고 역사적이예요.
저는 검은 삼나무 언덕 위에서 도시락을 폅니다.
홈이 파인 당신의 뼈와 아칸서스 잎 모양의 머리칼은
옛날처럼 어수선하게 지평선까지 널려있어요.
그렇게 황폐하게 되려면
벼락 한 번만으론 부족할 거예요.
밤마다 전 바람을 피해
양의 뿔모양을 한 당신의 왼쪽 귀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붉은 별들과 자줏빛 별들을 헤아린답니다.
태양은 기둥 같은 당신의 혀 밑에서 떠올라 와요.
제 시간은 그림자와 결혼해써요.
이제 전 더 이상 선착장의 얼빠진 돌에
배의 용골이 긁히는 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아요.
*오레스테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가멤논과 클뤼템네스트라의 아들로, 어머니는 죽인 죄로 복수의 여신들에 의해 쫓겨남
거울
실비아 프라스
나는 은빛이며 정확하다. 나는 선입견이 없다. 나는 보는 것을 즉각 삼켜버린다. 있는 그대로, 사랑이나 미움으로 채색됨이 없이, 나는 잔인하지 않다 단지 진실할 뿐-네개의 모서리가 있는 작은 신의 눈. 대부분의 시간 나는 반대편 벽을 바라보며 명상한다. 그건 작은 반점들이 있는 분홍빛.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와서 그것은 마치 내 심장의 일부인 것 같은 호수다. 한 여인이 내게 몸을 숙인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내 한계까지 찾아보면서. 그런 다음 그녀는 저 거짓말쟁이들, 촛불들이나 달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보상해준다. 나는 그녀에게 중요하다. 그녀는 왔다가는 간다. 매일 아침 어둠을 대신하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다. 내 속에 그녀는 어린 소녀를 익사시켰으며, 내 속에서 한 늙은 여인이 매일 그녀을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실비아 플라스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지독한 우울증이었다. 남편이며, 시인인 테드 휴즈를 너무나 사랑했다. 지독한 사랑은 반드시 변형된다. 그녀는 언제나 분노에 차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했다. 샤오홍과 다르지만 같다. 샤오홍은 본질이 타자지향적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랑 더 닮은 것 같다. 디에고에 대한 존경, 믿음 사랑, 자신의 비관적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프리다는 실제보다 그림에서 더 가혹하게 자신을 그렸다. 샤오홍은 실제와는 달리 아름다고 서정적인 들을 썼다. 하지만 작품이 아닌 삶은 닮았다. 모두 닮았다.
[뿌리 혹은 거친 땅] 프리다 칼로
천재적인 여류 예술가들은 왜 같은 패턴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여자들에게만 전형이라는 것이 있는가? 중국, 미국, 멕시코... 우리나라의 전혜린, 나혜석
이들은 모두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며 한 남자를 끝없이 애증했으며, 요절하였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삶을 타고 난듯이, 벗어나려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운명대로 살 수 밖에 없었던 듯 같은 결론을 내고 마는, 왜?
[황금시대]는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전 일본의 중국 침략기-중국도 우리만큼이나 처참한 공격을 당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가 몇 편의 영화를 통해 거의 이해가 되었다.-의 천재작가 샤오홍의 이야기를 당시 함께 활동을 했던 여러 문인들의 증언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중국 근현대 작가에 대해 전무한 관계로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큐정전]으로 유명한 루쉰과 샤오홍이 친했다는 이야기를 나와서 대단한 작가였구나 하고 가늠을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영화의 완성도나 뭐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위의 두 예술가와 함께 샤오홍을 엮어서 관람을 하는 바람에 엄청 과장 확대 해석하면서 영화를 보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전형 혹은 패턴, 운명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버렸다. 예술적 광기를 가진 여자들의 패턴... 왜?
내가 처음 접한 중국영화는 [황비홍] [강시] 뭐 이런 것들이라 난 중국영화를 보면 밥이 삼켜지지가 않을 정도로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중국말만 들어도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영웅본색] [화양연화] [동사서독] 같은 류의 영화들을 제 때 보지 못했다. 싫어저..., 최근 [완령옥]과 더불어 중국에 대해 좀 친해진 느낌이다.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인물에 대한 서정적인 접근이 내게 좀 맞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게 중국이 좀 달라지고 있다. 일본영화를 통해서 일본이 좀 달라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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