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닥친 태풍,
부서진 잔해.
그곳에서 다시 설 수 없는 인간.
이라면,
시간이 필요하다.
공간이동이 필요하다.
그곳이 아니면 어쨌든 살아갈 수는 있다.
어쨌든 살아가다보면,
태풍의 시간을 돌이켜 볼 수도 있고,
부서진 잔해가 흩어진 태풍의 현장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된다.
러덜리스는 보트의 키가 없는 상태
그래서 방향을 잃어버린, 혹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쩌면,
러덜리스는 본능적인,
인간이 본능을 감지하는 순간일런지도,
무엇이든 선택을 할 것이고,
그것은 본능을 직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샘은 부와 능력을 갖춘 유능한 광고제작자였으나
아들 조쉬가 일으킨 총기난사사건의 충격으로 자신의 모든 것들에게서 떠난다.
살인자의 아버지는 페인트공으로 요트에서 숨어산다.
유능한 광고제작자에서 잔인한 살인자의 아버지로.
자신에 대한 정의가 사회에서도, 자기자신에게서도 바꼈다.
어느날 엑스와이프가 전해준 아들의 유물,
아들이 작곡한 노래를 담은 씨디와 메모노트.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아들의 낙서를 읽는 것,
아들을 대면하는 것.
아들의 만든 노래를 부르는 샘에게 아들 또래의 쿠엔틴이 밴드를 제안한다.
무대공포증과 대인장애를 가진 쿠엔틴에게서 아들을 느낀다.
아들에게 이야기하듯 쿠엔틴에게 이야기한다.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살인자의 아버지라는 정체가 드러났다.
하루 이틀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마지막 장면
아들 조쉬가 총기난사사건의 범인임을 고백하고,
아들의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 샘.
머리가 하얗게 센 아버지는 마치 갓 사춘기를 벗어난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태풍을 맞았을 때와는 다른 샘,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기타 하나에 샘은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 아들의 노래를 부른다.
몇몇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아마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우리들.
한없이 짠한 영화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 그의 어깨를 토닥였을 것이다. 짠해서...
.
.
.
비슷한 사건을 모티브로 엄마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었던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영화 광고에는 [비긴어겐인]과 [인사이트 르윈]과 같은 음악영화로 분류하였지만,
그것을 기대하면 실망일지도 모른다.
샘의 지도에 나의 위치를 찾는 네비게이션을 돌려보면,
아들의 사건과 아들의 노래임을 숨긴 채,
아들에 대한 이해와 아들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었을 노래를 대신 세상에 들려주기 위해
밴드를 결정하고 노래를막 시작한 그 어느 지점이다.
나도 언젠가는 샘처럼 아주 작은 무대더라도
진정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노래를 하는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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