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절거림

시간 그리고 기억

by 발비(發飛) 2014. 10. 17.

현재 나의 모든 고민들은 시간의 문제였다.

시간은 곧 기억의 문제라고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는데, 그런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 아니라 기억.

내가 욕망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들은 대부분 기억에 근거한단 말이지.

어떤 시간의 사랑에 관한 기억

어떤 시간의 자리에 관한 기억

어떤 시간의 여행에 관한 기억

이런 기억이 없다면 나는 고요할 것이다.

기억이 나를 흔드는 것이다.

 

그가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닭을 샀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나는 그에게 닭을 빚진 적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닭을 먹지 못했다, 물론 만지는 것은 더 못했다. 거의 공포수준으로 경기를 하곤 했었다.

그때쯤 그의 앞에서 닭고기를 만져야 할 상황이 되었고,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의연하게 해내고 싶었으나, 결국 비명과 함께 자지러졌다.

그가 나를 대신해 닭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그의 이미지는 닭을 씻던 그의 뒷모습이다.

그가 온다기에  닭을 사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오면, 그때처럼 닭을 씻어달라고 할 참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씻어보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만져보는 것이겠지.

속장갑을 끼고 고무장갑을 끼고, 닭을 만졌다. 씻었다. 두번이나 꼼꼼히 씻었다.

비명도 없었고, 심장도 안전했다.

닭요리 소스로 요리하고 있지만, 맛있을 것이다.

시간이 그만큼 간 것이다.

마치 닭을 중심으로 내가 달라졌듯 서로의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진 무엇이 그저, 어떤 이유와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한 닭요리가 맛있게 된 것처럼

그저 현재만의 모습으로, 충분한 관계였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시간과 기억이 놓여있을 뿐이다.

시간은 현재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고, 기억 또한 현재에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연연해 하는 , 그래서 왜 그랬냐며 따진다면, 그 시간을 어쩔 것이냐고 다그쳐 묻는다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하게 말할 것이다.

그걸 왜 신경쓰냐고,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기억도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시간이 기억을 화석으로 만들었다고.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나를 멈추게 한다.

과거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현재의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은 지금, 바로 지금일때만 진실이다.

사랑에 관한 기억

자리에 관한 기억

여행에 관한 기억

기억은 현재가 아니라잖아.....시간이 가버렸대잖아. 가줬대잖아.

 

갑자기 <가지 않은 길>이라는 프로스트의 시가 생각났다.

장난처럼, 어깃장을 놓은 것처럼 조금 비껴,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라는 시를 시간과 기억의 관점에서 우겨 감상해본다.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추어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이곳이 누구네 숲인지 나는 알 듯도 하다

그러나 그는 마을에 있어

내가 여기에 와 멈추어 서서

눈 덮여가는 숲을 보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내 작은 조랑말은 뭔가 이상해하네

가까운 곳에 농가도 없고

얼어붙은 호수뿐인 깊은 숲에 와 멈추어 선 것을.

일년 중 가장 그윽히 어두운 날 저녁에

조랑말은 방울을 한번 짤랑거려본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듯이

그 외의 다른 소리라고는

숲을 쓸어가는 부드러운 바람과 하늘거리는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저물었고 깊은데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Whose woods ther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주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화이트 브레드 없어요? 했을까  (0) 2014.10.20
새벽 다섯시  (0) 2014.10.20
바퀴의자에 관한 잡설  (0) 2014.10.14
떠돌이의 소원  (0) 2014.09.23
꼭 힘이 필요할 때  (0) 2014.09.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