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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도종환] 담쟁이

by 발비(發飛) 2012. 11. 28.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가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1.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

어제 그의 광화문 유세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도종환시인은 자신의 시 '담쟁이'를 낭송하였다.

시가 이리도 적절할 수 있을까?

시는 이렇게 적절해야 한다.

적절함이 맞아 떨어졌을 때의 쾌감이야 말로 시를 읽는 자에게는 카타르시스 지점일 것이 분명하다.

 

2.

담쟁이, 어릴 적 우리동네에는 일제말 미국 선교사가 살던 집이 있었다.

안동이라는 곳에 어울리지 않는 교회처럼 생긴 집, 어느 날 그 집에 몰래 들어갔다.

마당에 깔린 잔디도 낯설었지만, 큰 돌이 박힌 시멘트 높은 벽에는 담쟁이는 더욱 그랬다.

이층도 넘는 높이에 벽을 빽빽히 에워싸고 있는 푸른 잎, 집이 마치 나무인듯, 꼬물거리는 듯해 징그러웠다.

잠시 살았던 대구 파동 국민주택 담에도 있었고,

일때문에 자주 들렀던 대학로 문예진흥원 건물에도 있었다. 

 

3.

나는 그것들이 그런 줄 몰랐다.

다만 어딘가에 붙어야만 올라가는, 담쟁이 손은 마치 내 몸에 붙어있는 것처럼 이물감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분노, 그렇게 붙어있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어제 시인의 목소리로 들은 담쟁이.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누군가에게 붙은 것이 아니라, 누가 주인인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공유였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나에겐 벽과 같은 의미인 '떼'. 내게 선의의 떼가 없었다. '떼' 가 언제나 폭력과 제압만이 아니라는 것. 나는 그것을 생각지 못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벽'이라고 한다면, 내가 벽이었다.

나의 '담쟁이'는 어쩌면 아직도 나를 넘고 있을 런지 모른다.

점점 높아지고 있는 벽을 쳐다보며, 내 오만 것들을 한 잎 한 잎 챙겨, 그 손을 절대 놓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끌고 나의 쌓고 있는 그 벽을 넘고 있을런지 모른다.

나의 담쟁이는 오늘도 나 때문에 꾸역꾸역 마른 손으로 나의 벽을 오르고 있을런지 모른다.

나는 담쟁이가 이런 줄 몰랐다.

 

오늘만이라도, 벽을 높이는 일을 멈추도록 하겠다.

오늘만이라도, 그들을 숨돌리게 하자.

오늘만이라도,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차갑게 부는 바람이라도, 그 틈에라도  펄럭거리며 벽에 붙은 손을 바꿀 시간이라도 주자.

 

4.

시가 선물해주는 새로운 의미, 나는 오늘 아주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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