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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

by 발비(發飛) 2013. 7. 12.

저는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인간의 세가지 감정을 우려먹으며서 역사가 흘러왔다고 생각해요.

바꿔말하면 어떤 장르든 이 세가지만 파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게 바로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에요.

이 세 가지가 저를 이루었어요.

저는 누구보다 수치심이 심한 사람이었고, 허영이 너무 강한 사람이었고, 죄의식이 너무 큰 사람이었어요.

학생들한테도 그래요.

"너희만 한 나이 때 허영을 안 가져보냐, 읽지도 못하는 외국 서적을 마음껏 옆에 끼고 지하철 타라. 너희의 그 불완전함이 결국 너희를 채울거야. 지금도 나는 제대로 간지를 내기 위해서, 쪽 팔리기 싫어서 노력하는 거야. 그건 분명히 내 허영이지. 근데 나는 허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내 허영이 그를 알아보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렸을 때 겪은 가난과 상처와 상실이 주었던 수많은 수치심들, 씻을 수 없는 죄의식들...,

그것들과 아직 화해를 못 한 거죠.

 

-[PAPER] 2013.7월호 시인 김경주 인터뷰 중에서

 

아..........................................죽인다!

글로 느끼는 전율,

기호에서 생명체가 되는 순간,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꼈다.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라니.

그렇다면 나 또한 예술가가 될 기질이 정말로 다분하군.

나도 그처럼 아직 그것들과 화해하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옆에 두고 있지도 않은 듯.

 

 

모양을 달리 하는 셀 수 없는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 세포분열을 한다.

이것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어느 때 나는 땅을 파기 시작했고, 그들의 잔재들이 하나씩 하나씩 출물할때마다 즉각 잡아 땅에 묻어버렸다.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은 살아있어,

그 모습 그대로 있지 않았다.

 

 

 

그렇다.

이젠 그들이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 옆에는 마치 왕릉과 같은 크기의 봉분이 있다.

봉분을 파면 이것들은 분명 출몰할 것이다.

개중에는 세포분열을 마친 것들, 완전체에 가까운 모양을 가졌을 새로운 버전의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 있을터이고,

개중에는 세포분열을 끝내지 못하고 시체가 되고 만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내성이 강해졌으니 말이지.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은 처음에는 이름 그대로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었으나.

이젠 그 이름도 달리한다.

뻔뻔함, 무대뽀, 허세... 이런 류가 아닐까?

 

예술가가 되지 못함은 어쩌면 불완전체이지만, 나의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을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가 아닌 인간이 되지 못한 이유도 어쩌면 한 가지?

 

아프더라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어야 했다.

상처가 아무는 순간, 아픔이 가시는 순간, 세상의 공기가 와는 직접 대면할 수 없으니.

살갗이 벗겨진 뒤 입바람을 불었을 때 느껴지는 미세한 바늘의 힘을 가진 바람을 느낄 수 있듯이

 

나에게 상처가 사라진 순간, 세상의 적나라한 느낌들 알아챌 수는 없다.

세상을 맨몸으로, 가장 가깝게, 차갑게, 뜨겁게, 아프게, 느끼는 것이 예술이므로.

 

내가 좋아하는 김경주시인,

나는 그의 위험한 언어들이 좋다.

그의 위험한 언어들은 언제나 나를 긴장시킨다.

 

말의 힘, 단어의 힘,

나는 시인이 가져야 할 최후의 사명이 언어개척, 의미개척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수치심, 죄의식, 허영심이에요.

이 세 가지가 저를 이루었어요.

저는 누구보다 수치심이 심한 사람이었고, 허영이 너무 강한 사람이었고, 죄의식이 너무 큰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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