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한 잔을 권하다
박상천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뜨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은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추줌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 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마라. 낮술 한 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내게 어느 날에는 있었던 것이 사라졌다.
좋게 말하면 용기, 나쁘게 말하면 무모함.
나는 그것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성적 판단, 그 따위것은 믿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은 저 멀리 두고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만 집중했던 시간, 오직 동물적 감각으로 움직였다.
그 때 그 시간에 그것이 있었다.
용기 혹은 무모함이 필요한데 그것마저 없을 때는 낮술을 마셨다.
그러면 구름 낀 흐린 하늘이 배실거리며 환해졌다.
그러면 나도 배실배실 웃을 수 있었다.
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생 뭐 있어! 알코올이지! 하면 보람차게 잔을 올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확신에 찬 말들을 주절거렸다. 마치 그 순간에는 다 이룬 것처럼, 다 해결된 것처럼, 세상이 환해졌다.
맑고 밝은 대낮에 사람들 사이를 휘청거리며 걸을 때,
간혹 누군가 나의 추태에 눈을 흘기며 지나가더라도 나는 웃어주었다.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이 답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딱 하나, 낮술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아련하고 몽롱해지며 시간이 쪼그라든다.
아주 먼 옛날 어느 사람이 그때 그 모습으로 곁에 와 앉아있다는 것.
유일하게 위험을 실감하는 것이라고는 이것 뿐이었다.
이제 사라진 것들이다.
박상천시인의 낮술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내게 용기와 무모함은 언젠가부터 사용하지 않는 낡은 기계처럼 방치되었다.
지금 내가 나아가기 위해 쓰는 것은 과연 뭘까 생각해본다.
알량한 이성과 얕은 지식들이다.
얇고 가는 줄을 지지대로 매단 조각상의 모습이다.
바람이 불까 두려워하는 조각상의 모습이다.
몇 가닥의 줄을 더 매달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군가 낮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상천 시인의 시를 찾아 읽고, 그 시를 즐겨 읽을 때쯤의 공감을 재현하며,
그 때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보며, 나는 내게 사라진 줄이며, 다시 엮어매야 하는 줄이라는 생각을 한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추줌거리는
나를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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