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 없음 중에서
배수아
그때까지 그것은 나에게 철저하게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소리를 가진 하나의 문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두웠으나,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더욱 심각하게 고백하자면, 사실 온전히 예술이며 문학적인 것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흔히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글로도 썼으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떠할 것이라는 아무런 예감조차 갖지 못했다. 한때 살아있었다고 우리에게 알라여진 누군가가 '진정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이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결코 돌이킬 수 없음'이란 어떤 성격의 상실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죽음을 외면하거나 금기로만 여기는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해인가 나는 한국에서 삼천 원을 주고 거친 삼베 상복을 한 벌 사서, 베를린에서 그걸 입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그 옷의 섬유는 유난히 거칠고 바느질도 성의없이 되어 있는데, 솔기에는 실밥이 드러나고 마무리도 눈에 띄게 엉성한데, 거기에는 혹 무슨 까닭이 있느냐고. 당시는 그 답을 몰랐으나, 아마도 지금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리라.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의 탓이므로 우리는 이런 옷을 입는다고. 살아있는 자가 곧 죽음의 원인이므로 우리는 죄의식을 가진다고. 우리가 자라나는 동안 한 사람이 늙어갔으므로. 우리가 건강한 동안 한 사람이 병들었으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한 사람이 죽어 있게 될 것이므로.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죽고, 그리하여 남아있는 자들의 죽음이 보류되는 것이므로. 이 세계의 상태를 하나의 문장으로 나타내자면 다음과 같다.; 자연은 조화를 유지하고 인간은 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죽게 될 것인지. 그 문제데 대해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보았고 그것을 글로 써두기고 했다. 그러게 하여 얻은 결론은, '어느 날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잠든다. 그리고 거센 바람 속에서 깨어나면, 나는 죽어 있다. 그곳은 적막하고 높은 산봉우리. 사방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이 오직 놋쇳빛 황무지만이 끝없이 펼쳐진다. 나는 죽어 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때 어떤 소리가 나를 향해 들려 올 것이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고통에서 해방된 죽은 자의 문장일 뿐, 죽음을 마주한 산 자의 것은 아니었다. 이 문장에는 살도 피도 없다. 누군가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죽음에 관해서는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베르너와 나는 시계가 정각 오후 두시를 가리킬 때 식당을 나왔다. 그대는 사람들도 대부분 돌아간 다음이었다. 다행히도 그날은 비가 뿌리는 날씨가 아니었다. 마치. 네 메일에 나왔던, 켐포우스키의 장례식 날과 같군. 하고 나는 문득 떠올렸다. '적어도 비가 뿌리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고 너는 적었다. 우리는 서로의 침묵에 의지하면서 말없이 걸었다. 하이드하우젠 묘지를 떠나 아인슈타인 거리를 따라 걷다가 이자르 강의 다리를 건너 막시밀리안 거리로.
단편소설 중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한 것이다.
죽음이 참 고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런 정도라면 삶도 죽음도 평화롭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인간은 운다."
돌겠네..... 정말 돌겠네. 죽여주는 문장이다. 역시 소설은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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