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간다
김경주
어쩌면 벽에 박혀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찌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 오만함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오는 것인지 모른다.
오만함의 틀을 하나씩 벗어나가는 것,
그것이 단지 인간의 오만함이었다는 것은 절망 이상의 것이다.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어쩌면 벽에 박혀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벽,... 그것은 세상이기도 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최고의 지배자인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진 부류이다.
난 못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오만한 인간세상에 박혀있다.
점점 더 오만한 모습으로 강화되면서 말이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꽂혀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그래, 난 잘났어!
하고 외친다고 뭐가 나아지는 것은 없다. 처음 그대로의 모습일 뿐, 태어난 인간의 모습 그대로일 뿐, 갓난아이의 모습 그대로일 뿐.
그 잘난 모습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살다보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삶에 끼어든다.
뭣도 아닌 것이 스르르 스며들어 조금씩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나를 숨쉬게는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흔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흔들리기 시작하면 벽에 박혀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인지.
더는 벽에 박혀있을 수 없는 시간.
만물의 영장이며, 태어나면서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인간, 그런 줄 알고 있었던 나, 곧 못.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벽에서 추락할 때, 그 순간은 예측한 일이 없다.
그저 툭...
하나 둘이 아니다.
내 오만함의 원형들은 주머니 한 가득... 못이라는 이름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온갖 인간의 인간성들... 오만, 편견, 타협...
그것들을 놓고 나면 무게를 잃어버리고 몸이 날린다. 날아간다 혹은 떠다닌다.
몸이 내린 곳은 누추하기만 하다.
인간이 머물 수 없는 원초적 동물의 공간. 그 곳에 못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벽에 박혀있으며.
곧게 박혀있으려하였으며.
오래 박혀있으려하였으나.
몸이 뒤틀리기만 하였을 뿐.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남몰래 몸을 휘고 있었던 것이다.
벽에 스민 바람을 틈타 내 몸이 휘고 있었던 것이다.
벽에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밖으로 던져졌을 뿐이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주인이 아니라
인간세상이 주인이 아니라
너희들의 주인이 아니라
...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기르는 참 못된 짐승, 언제나 나보다 먼저 나와 나처럼 행사하는 그 못된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몸을 휘면서 꺼이꺼이 울고 난 뒤,
비로소 나의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과는 별도로...
김경주시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2006년에 시집이 나오자 일독하며, 올린 시가 이 블로그에 있다.
그때, 나는 오직 '시를 만났다' 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어젯밤, 다시 김경주 시인의 시집을 들었다.
할 말이 많아졌다.
그의 울음 소리를 닮은 나의 울음 소리가 벽 속에서 들렸다.
아직 낡은 여관방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시각 바람이 되어 내 세상의 벽에 스미었다.
틈새로 울음이 공명으로 울린다.
빼고 박도 못하는 곳이 세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 대성통곡을 해야한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족속은 절대 절망적이지 않다.
시인이라는 족속은 죽어도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끈질기다.
대성통곡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넌 이제 니 속에 니가 기르고 있던 야생의 짐승을 길들인 것이다.
이제 너의 손에 더러운 것들을 묻히지 말고 잘 길들여진 짐승을 세상이라는 벽을 뚫을 수 있도록 파견하라!
.... 이렇게 말한다.
....'시'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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