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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제주] 올레 & 어리목

by 발비(發飛) 2009. 1. 4.

제주를 다녀왔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그렇게 외친 지 일년만에 드디어 제주를 갔었다.

 

급하게 결정하느라, 그리고 섬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향했는데

파고가 4,5미터나 된다더니

큰 배를 탔음에도 밤새 멀미가 장난아니다.

그나마 화장실이 깨끗해서 밤새 들락거렸음에도 견딜만했다는...

역시 문제는 문제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인내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귀한 경험도 했다.

 

 

갑판 위에 켜진 전등때문에 밤바다는 더욱 캄캄했다.

떠날즈음이라 멀리 인천연안부두가 보였다.

세상 전체는 캄캄한 암막,

그리고 암막 사이로 비치는 불빛.

불빛은 사람의 흔적이다.

 

 

 저녁 6시에 출발한 배는 아침 8시 반에 제주항에 도착했다.

제주항에 도착하자 바로 쇠소깍으로 이동, 목표했던 올레도전에 착수!

총 11구간 중

이번 제주올레트래킹의 목표구간은 6,7,8,9구간이다.

거의 60킬로미터...

할 수 있을까?

몇 년전 산에서 다친 발목이 신경쓰였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그림자를 의식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의 그림자이다.

간혹 누군가와 걸을 때 나의 그림자가 의식되었다면, 그건 그 누군가와 함께 있으나 자신에게만 빠져있다는 증거이다.

내 그림자가 올레를 걷는 내내 나와 함께 해 주었다.

파란 화살표는 제주올레를 따라 가는 표지이다.

 

코엘료의 연금술사...

표지...

길...

 

 

 6코스가 끝나는 지점인 아름다운 외돌개 위엔 '솔빛바다'라는 또 아름다운 찻집이 있다.

26킬로 라고 했던가..

많이 걸었더니 몸이 피곤하다.

전날 잠을 설쳤더니 정신이 몽롱하다.

그래서 유자차와 커피를 동시에 시켜놓고 신발을 벗고 다리를 의자위에 쭉 뻗고 쉬었다.

그것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올레꾼이 쉬어가는 곳.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으나 얇은 창으로만 지어진 작은 집안은 바람 한 점없이 햇살만 가득 가득 들어왔다.

발의 고단함을 가득 안고 있는 등산화에도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올레는 이리저리 엮여있다.

서귀포 시내를 통과해서 전에 들렸던 이중섭미술관과 생가에도 들렀고,

전과는 다르게 좀 더 친숙한 서귀포를 가로질렀고,

걷다보니 몇 년전 자전거로 지났던 길들이 기억나서 새삼 다시 가는 길에 대한 생각들,

다시 가는 길...

다시 가는 길은 편안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고... 다시 걷는 길.

다시 가는 길을 걷다보면 불현듯 처음보는 산길도 나왔다.

처음 걷는 길이라서 잘 못 들었을까 긴장하며 산길을 헉헉 거리며 오르는데, 뒤돌아보니 내가 온 길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가 본 길이 되었다.

가 본 길...

언젠가는 다시 가는 길이 될 길...

 

 

남쪽나라, 제주도

바람이 찬데 물은 어떤지.

저 물이 바닷물은 아닐텐데, 제주에서도 빨래할 민물이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저런 아낙.

상상 속의 나보다는 훨씬 할머니이지만, 나도 저 자리에 저러고 앉아 아름답게 빨래를 하고 싶은데

상상하는 내가 등장하는 그림은 사실 더 아름답다.

우기고 싶은 꿈이다.

 

 

올레의 단점.

한 번 들어가면 나올 길이 없다.

차나 가게가 있는 큰 길로 나오려면 차라리 한 구간을 끝낼만한 거리이니 도무지 에너지를 보충할 길이 없었다.

미리 먹을 거리를 준비했어야 했었는데,,, 사람 사는 곳을 지날 줄 알았지.

없음이다.

누군가 올레를 간다고 하면 먹거리를 준비하시길...

그러다 참을 수 없을만큼 에너지 급소진!

그때 내가 한 일이란?

널린 것이 감귤과수원, 어찌 그리 보안에 신경을 안쓰시던지, 3무 중에 도둑이 들어있었지...

그런데 난 그 3무 중의 하나 도둑이 되어 과수원담장 밖으로 늘어진 가지에 달린 귤 하나를 쓱싹했다.

무지하게 달더라.

한 짓이 있는 터라 허겁지겁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지.

 

 

해가 지지 시작한 제주의 바다는 너무 추었는데,

그 때 만난 장소가 풍림리조트 전망대 끝에 있는 바닷가우체국.

바람이 무지 부는데 우체국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겠더라.

주소가 담긴 수첩? 그건 요즘 없는 거잖아.

내가 외우고 있는 주소는 회사주소뿐이었으므로 난 회사사람들에게 엽서를 썼다.

너무 추워서 손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몇 장의 엽서를 계속해서 썼다.

뭐라고 썼는지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나 그 시간이 소중했다.

 

소통을 원한다는 증거였다.

소통할 여지가 있다는 증거였다.

소통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튿날.

더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월평에서 시작해서 중문단지를 지나...몇 개의 해수욕장들을 지나(8구간, 참 아름다운 구간이다)

 여긴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다.

그 끝에 작은 카페 하나 '물고기'

카페안에서 유리창너머로 보이는 대평바다.

 

점심때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아직 먹지 못했다. 여전히 먹을 곳이 없었다.

'물고기'에서는 스파게티 같은 메뉴가 있었으나 카프리를 시켰다.

왜냐면, 누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를 보자 술이 당겼다.

장선우 감독

내가 아는 그는 기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좀 특이한 사람으로 분류된다고 들었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작은 카페를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서 말이지.

평화롭다는 것은 쓸쓸함을 포함하는 단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다.

그런 짓을 절대 하지 않는 편인데 왠지 그와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는 거절을 했다. 인정!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는 내 어깨에다 손을 얹어도 되겠느냐며 포즈를 잡아주었고... 우리(?)는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공평해야한다며 그의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내 오랜 역마가 이 곳에 와서 멈췄어요. 벌써 3년째가 되어가네요. 너무 아름다운 곳이죠..."

 

우린 자신의 눈으로 본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혼돈'이기도 하고 '방황'이기도 하고 '기행'이기도 하다.

나도 나에게 맞는 아름다움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제주의 3일째)

죽을 것 같은 이 피로함.

난 이틀동안 거의 60킬로에 가깝게 걸었다. 난 왜 죽을 것처럼 지친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올레 한 구간을 더 걸을까... 하다가 영실- 어리목구간을 오를까...

한라산을 오르고 싶었다.

백록담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다친 발목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접었는데,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영실-어리목을 감행했다.

구간이 제주사람들에게는 산책코스라고 들었고

완만하다고 들었고

여기는 뭍사람들보다는 제주사람들이 더 사랑하는 코스라는 소리도 들었으므로...

갔다.

 

서울에서 한라산을 보면 오르고 싶을까봐 배낭에서 빼놓고 온 아이젠...아... 아이젠... 없다.

눈 덮힌 한라산을 아이젠도 없이 올랐다.

그러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만났다.

구름이 눈덮힌 한라와 딱 붙어있다.

냅다 달려 점프하면 구름 위에 올라 탈 수 있을 것 같다.

 

 

한라의 윗세오름에서 컵라면으로 점심과 추위를 떼우고...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남았다.

마침 제주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장터로 가서 장도 구경하고 순대국밥을 먹기로 했다.

제주 오일장...

대한민국 모든 시장들이 규격화되고 통일화되어 어디를 가나 똑같은 모양인데,,, 여긴 아직도 다르다.

내가 본 어떤 오일장보다 크다.

무지하게 크게 열리는 제주 오일장.

미리 먹은 국밥이 후회될 정도 먹거리들이 많았다.

담에는 절대 국밥을 먹지 않고 배 쫄쫄 굶고 가서 제주의 손가락 음식들을 만끽할 거라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제주 3일 여행

 

갑자기 떠나서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나이에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지.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난 한라보다 더 큰 산 하나를 넘고 있나보다.

산을 넘을 수도 있고, 산을 넘지 못할 수도 있겠지.

 

커다란 산을 넘는다면 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이 산을 넘지 못한다면 산 아래 세상이 아닌 산 중턱 어딘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새로운 세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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