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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가을 길상사

by 발비(發飛) 2007. 11. 13.

백수 첫 날.

늦잠을 잤다.

주거관계상 햇살 가득 비치는 아침잠을 잘 수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푹 잤다.

뭘할까? 하다가 집안에 있는 옷과 이불 들 중 단 한번이라도 손이 간 것들은 모조리 세탁기로 ...

온 집 가득 빨래가 널렸다.

집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군.

 

아침에 통화했던 이동미여행작가가 쓴 책 '골목이 있는 서울, 문화가 있는 서울'이라는 책을 펴놓고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 결론이

바로 길상사이다.

백석시인의 정인라고 하는 '자야'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기증하여 지금의 길상사가 되었다고 한다.

 

가을 길상사.

사람들이 없다.

아주 고요했다.

 

 

길상사에 들어서자 다른 절과는 다르게 사천왕상은 없다.

이런 구조로 절이 되기도 하는구나...

빨갛게 물든 단풍이 덤벼들 듯 하다.

 

붉은 물로도 씻어낼 수 있겠구나, 빨갛게 물 배이고도 깨끗하다 말할 수 있겠구나.

 

 

켜켜이 쌓인 것들이 아름답다.

담장위의 기와.

그 위에 쌓인 낙엽

다시 기와

다시 그 위에 쌓인 낙엽

시간을 기다리며 그 곳에 곧 쌓이게 될 파랗게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켜켜이 쌓인 것들은 쌓여있어서 아름답다.

 

나도 누군가의 위에 내려 앉아 쌓여있는 한 층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아름다움에 한 몫을 할 수 있을까?

 

 

 

저 정도는 되어야지.

그 정도 넉넉함은 있어야지.

살다 살다 이 세상은 이것이 끝이야 라고 손을 놓은 어떤 이에게 잠시 머물 수 있는 어느 곳은 되어야지.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더라도

잠시라도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는 만들어 줄 수 있어야지.

난 그런 연옥이고 싶다.

 

 

 

 

 

 

 

가을 길상사에서 머물렀던 시간,

잠시인데, 신기하게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야!

어디야!

하면서 내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참 오랜만에 나와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그래서 내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을 하나씩 꺼내어 더불어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어찌 알았는지.

몇 명의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다.

백수 첫 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거야? 하면서 말이다.

걱정되었겠지.

길상사라는 말을 하는 순간, 모두 같은 대답이다.

역시 넌 팔자가 좋아.  부럽다!

 

걱정되어 전화했다던 친구들은 길상사 가을 한 복판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톤씩 목소리가 밝아졌다.

가을 길상사.

붉은 빛으로도 깨끗하다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온몸이 빨갛게 여물어버린 여자가 서 있어도 하나도 민망하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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