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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조현석] 꺾인다

by 발비(發飛) 2007. 4. 3.

꺾인다

 

조현석

 

황급히 집을 나와 시외버스 타고

조금 느긋하게 다시 시내버스 갈아타고

달려가도 거의 2시간

또 부지런히 10분 땀 흘리며 걸어

지하철 타고 30여 개 역 지나

겨우 도착해도 1시간26분

그리고 차 막히지 않을 때

시속 90에서 100킬로미터로 달려도

40분에서 1시간 정도

 

이것저것 다 빼고 나도

그대와의 거리는 너무 멀다

서로 만나지 않을 땐 더욱더 멀다

너무 멀다, 제발 그러지 마라고

되뇌이는 머리와 마음

심리적 거리는 늘 가깝다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늘 당신 곁에 있다

밤잠 안 오는 날 밤 FM 라디오 음악을 들을 때도 있고

늘어지는 테이프나 빛나며 돌아가는 CD 위에도 있고

혹은 이른 새벽, 싱크대 앞에 서서 된장찌개 끓이며

숟가락으로 간을 보는 그 순간에도, 소파에 앉아 쉴 때도

혹은 오랜 만에 친구 만나러 분주히 길을 걸을 때도

지하철 안에서도 그림자처럼 붙어다닐지도 모른다

그대는 전혀… 놀라지 마라

잠시 앉아 있다 간 그 자리에 잊지 않고

살며시 다가가 다시 앉아볼 거다

 

앞서가지 못하는…, 한참 뒤에야, 더듬더듬 따라만 가는

내 무릎이 끝내 팍, 팍, 꺾인다

 

'그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이건 아픔에 관한 거지.

'그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해 본 적이 있나요? 이건 불가능에 관한 거지.

 

'그대'라는 이름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이름이지요.

'그대'가 옆에 있다면

이미 그대라고 부를 수 없는 실체가 되는 것,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되는 것- 내 옆에 있다가 없다가,  

나눌 수 있는 실체가 되는 것-존재하다가 부재하다가,

 

그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 너무 시적이지 않나요?

그대, 그대, 그대, 하고 부르면 시인의 말처럼 심정적으로 가까워지니까, 그건 정말 과도한 밀착일테니까, 내 속에 완전 하나된 그대일테니까  답답해!

 

그러다가, 무릎이 팍 꺾인다네요.

한걸음도 따라가지 못하지요. 심정적으로도

(......)

(......)

(......)

 

언젠가 그대라는 이름의 당신을, 그대라는 이름으로도 아주 가끔 부르게 되겠지.

심정적인 거리조차 사라지게 되는 날입니다.

그럼 말할거예요.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빼고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 그대조차 영원하지 않다고.

 

시적인 '그대'조차 잃어버린 날,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 하길......평화를 나눕니다.

 

ps: 그런데

     이 시를 읽고나니, 낮술이 먹고 싶어지네. 그럼 나의 작은 평화가 사라질텐데도.

 

 
 

낮술 한잔을 권하다

 

박상천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뜨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 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 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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