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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강정]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by 발비(發飛) 2007. 3. 14.

 

들려 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강정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어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오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나 이후로는

사망의 시간 속에 스며들다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쳐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궤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곧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 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너무 황당하지만, 시!

소리를 내어 읽어도 마음 속으로 읽어도 뭔지 모를 뭉퉁거림으로만 오는 시가 있다.

뭐야

뭘 어쩌란 말이야.

 

언젠가 가보았던 강남 어디쯤의 아주 모던한 레스토랑의 화장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바닥과 벽에 붙여놓은 타일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과 재질이었다.

현란스러움 그 자체,

포스트 모더니즘적 화장실?  말이 좋아 그렇지.

각각의 타일을 보면 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단 말이지. 이미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건 정신을 혹 빼놓는다.

그 가운데 앉아 있노라니 작은 화장실 안이 뺑뺑 도는 느낌이더란 말이지

그래서 난 내가 볼 일을 보고 있는지도

잊은채 볼일을 보고 있더란 말이지.

손을 씻는 세면기 앞에 서서도 손을 깨끗이 씻는데 집중하지 못하고 뱅뱅 도는 듯한 타일에만 집중이 되더란 말이지.

볼일을 본다던지 손을 씻는다는지 하는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지.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그것은 화장실이라고 써붙여진 문과 같다.

그리고 그 안에 씌여진 말들,

다 본 적이 있단 말이지, 다 안단 말이지.

모르는 글자 한 개도 없음. 낭랑한 목소리로 멋지게 읽을 수 있음.

그리고 모른다.

뱅뱅 돈다.

시 한편을 다 읽고, 자판으로 두드리기까지하고......

그런데 뱅뱅 돌더란 말이지.

익숙하고 낯설은, 그렇지만 자꾸 생각이 나던 그 화장실처럼 이 시가 내게 그렇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이미 우리 모두 본 것에 대해 겪은 것에 대해

나 이거 봤어 나 이거. 나 저거. 나 그거. 봤어! 라고 말을 하려고 했어.

들려주려는 것은 내 말이었다.

알아듣거나 못알아듣거나 상관없는 그저 말을 한 것이었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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