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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위선환] 등자국

by 발비(發飛) 2007. 2. 26.

등자국

 

위선환

 

아버지의 잠적이 쓸쓸해지고 그날부터 겨울은 저물기 시작했다 가랑이와 허리 아래는 몇 날이나 저물었던지 다음날은 어깨 너머로 하늘 빛이 저물고 얼음판 위로는 땅거미가 깔리고 그렇게 겨울은 하루씩 저물었다 다 저문 이튿날은 내가 저물 차례였다 비척거리며 나는 골몰길을 내려갔다 길에 누운 주검 위로는 저문 눈이 내리고 죽어서도 주검은 등이 얼 것이므로 걱정하며 더듬어서 구석에다 불을 켜고 그러고는 기대고 서서 속속들이 저물어지던.....,

 

그 벽에

 

우묵하게 등자국이 패어 있더라는, 먼저 기댄 자국 하나가 나란히 찍혀 있더라는.

 

 

 

 

"소영이가 어떻게 뺑뺑 도는지 아나? 소영이가 자는 거 보면 베개를 조금 당겨서 몸을 오그리고 조금있다가 몸을 펴고 또 베개를 조금 움직이고 다시 몸을 오그리고 그러면서 방을 뱅뱅 돌더라. 360도 한 바퀴를 돌면서 자더라."

 

토요일 새벽에 안동에 갔으니, 만 3일을 안동에 있은 셈이다.

그 중 하루는 친구의 결혼식에 있었고 나머지 이틀은 정말 잠만 잤다.

고질병인 불면증이 내게 있었는지 싶을만큼 낮이고 밤이고 잠만 잤다.

몇 달만에 집에 가서 잠만 자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아버지는, 오늘 아침 중요한 발견을 하신 듯 그렇게 엄마에게 말했다.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만 48시간의 아버지.

그렇지만, 난 단언한다.

아버지는 잠적하셨다고.....

나의 아버지는 나를 세상천지 아무도 없는 곳에 내버려두고 사라지셨다고.....

 

시인은 하루씩 날이 저문다했다.

하루가 저무는 것이 아니라 하루씩 날이 저문다했다.

최후의 방어선을 지켜주어야했듯이,

날이 저물지 않도록 온 몸으로 온 몸을 던져 해가 저물지 않도록 날을 사수했어야 했듯이

그래서 아버지의 날이 사라지지 않아

나의 차례가 오지 않도록, 전 날을 아버지가 사수했어야만 했듯이

아버지의 날이 저물고 나의 차례가 온 것이 마치 아버지가 아버지의 날을 지키지 못해서 인 듯이

나도 아버지의 탓을

아버지도 아버지의 탓을 하고 있었던 해도 없는 오후였다.

 

넌 종일 잤다.

온 방을 뱅뱅 돌면서 종일 잤다.

 

내일이면 어쩔 수 없이, 뻔한 싸움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로 가는 딸이 온 방을 뱅뱅 돌면서 자는 딸을 하염없이 지켜보셨다.

 

뱅뱅 돌면서 자는 잠.

아버지가 내 자고 있는 등 뒤에서 나를 밀고 있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밀고 있는 대낮의 잠이었다.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뱅뱅 돌았던,

그러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벌떡 일어나 지금 가겠다고 짐을 꾸렸다.

어쩌면 결과가 뻔한 싸움보다는 아버지의 잠적, 부재, 존재하면서 없는 듯이, 내게는 부재인 아버지가 어쩌면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단호히 아버지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나 지금 갈래요!

 

내일가면 신발 사줄께

내일가면 갈비 해줄께

 

아버지는 잠적하셨다.

잠적을 확인할 때마다 내 몸에는 손자국 하나씩이 찍힌다.

아버지의 손자국.

온 힘을 손바닥에 실어 나를 밀어내는 혹은 다그치는 혹은 흔들어대는

 

아파도 참는다

아버지의 손자국은 내겐 너무 오래동안 면역이 되었나보다.

온갖 이름으로 내 온 몸에 자국을 남긴 것이다.

 

몇 개 챙겨둔 물건조차 들고가기 싫다며 택배박스를 만들어놓고 현관을 나왔다.

 

"딸기 안 먹고 갔다. 딸기 먹고 가라. 난 지금 운동하러 나왔는데....그냥 간다고. 그래 알았다."

 

아버지도 아신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 나가야 하는 날임을 아신다.

언제나처럼 늦은 잠을 자다 해가 이미 저물어 갈 즈음에야 눈을 뜨고서야

그 시간까지 전날의 아버지가 나의 잠을 위해 대신 싸우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제 아버진 잠적하셨다.

나를 위해 대신 싸우시던 아버지는 어느새 사라지셨다.

일어나라고 일어나라고 내 등을 밀던 손자국들을 보고서야 아버지가 무던히도 나를 깨우셨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손자국을 낼 때마다 아팠던

아버지때문에 아프다고 아버지를 향해 소리치던

이제 더는 소리칠 곳도 없어 하늘과 땅... 세상 전체가 아버지의 손바닥같기도 한

 

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오후를 맞고, 저녁을 맞고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서울로 들어왔다.

 

잘 도착했어요.

전화가 되지 않아 납치된 줄 알았다.

 

그런데말이다. 내가 지금 아버지가 잠적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아버지,

 

 

잠적한 것이

 

사실이 아니었음 좋겠다.

 

그것은

 

 

차례가 아니라

 

아직도

 

아버지의

 

시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적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차례일 뿐인 것이다.

 

 

 

위선환 시인의 '등자국'을 읽으며......

 

'그렇게 겨울은 하루씩 저물었다 다 저문 이튿날은 내가 저물 차례였다 비척거리며나는 골목길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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