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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엄원태] 고요히, 입다무는 것들

by 발비(發飛) 2007. 2. 13.

고요히, 입다무는 것들

 

엄원태


1.

나, 몹시 괴로웠다

내눈에 젖은 것이 혹,

너였는지 모르겠구나!


먼지날리는 골목길에서

오지 않는 애인 지나가기를 기다리기

은행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땅바닥 내려다보며 낙서하기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 구걸하기......


가령, 부재를 통해서만 네가 내 안에 존재한다면


2.

꽃눈들이 울기 직전 아이들처럼

제 속에 터져오르는 것들로 안간힘이다

겨울을 견딘 속엣것들의 참담한 몸짓

깨문 입술 같은 꽃눈 하나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갠다


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깊고 멀다

너는 맑은 샘이었으나,

춥고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온 것......


3.

물안개에 산그림자 어둑해진다

어두울수록

잘 보이는 것들도 있다

컴컴해진 동공 속에 이미 등불이 있기 때문이다


결핍과 격리

그것은 내 고향이다

들판 건너 서쪽 하늘 핏빛으로 저물고

방 안은 시나브로 어두워가는데,

너는 부재란 방식으로 내 안에 가득하다


살갑게 만져지기까지 한다


4.

형체도 없는 잿빛 하늘

고속도로의 물바닥을 씹어대는

바퀴들의 끈질긴 울부짖음, 너는 그때 어디에?


참혹하여라,

빗속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백목련 꽃잎들


고요히, 입 다무는 것들......

 

 

창비시선 272 [물방울 무덤] 중 한 편이다.

시인에게 한 권의 시집을 내어 맘에 드는 시를 한 편 꼽으라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냐고 말하겠지.

하지만,

옆집 아줌마는 말한다.

그 집 자식 중 누가 제일 나아. 그 놈이 참 인간이 되었지.

옆집 아줌마는 그렇게 수다를 떨 수 있다.

 

오른쪽 집에 사는 아줌마는 공부 잘 하는 놈이 맘에 들고

왼쪽 집 아줌마는 인사를 잘 하는 놈이 말에 들고.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집 시들 중 이 한 편을 골랐다.

딱 한 눈에 필이 갔던 시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지 않고도 시 전체에서 뚝뚝 흘러나고 묻어나는 슬픔 아니 비애라고 하자.

비애.

슬픔 하나가 아니고 슬픔에 슬픔이 묻어있는

그 슬픔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 같은 것이다.

 

살다보면

어제는

 

혜화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비가 왔었지.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는 우산을 들고 전철을 기다리다가... 전철을 기다리는 데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

그런데 마치 비가 내리는 듯이 똑똑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

반대로 가는 사당역, 오이도역 방향의 전철은 벌써 4대나 지나갔는데도 오지 않는 당고개행 전철을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은 기다림도 잊어버리고

똑똑 떨어지는 우산을 타고 내리는 빗물만 보다가.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니... 그 사이에 내 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득해지도록 빗물만 보다가... 그것도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있는

 

환풍기를 틀었다고 광고하는 전철안의 방송을 들으며

인내를 푹푹 맡으며

누군가 부대끼며 사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있다면, 외로워서 죽을 지경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퇴근길 6시 30분즈음의 전철을 타라고 말해줘야겠다며,

그럼 사람과 어깨도 부대끼고 배도 부대끼고 엉덩이도 부대끼고 가끔 손가락도 스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봄비가 분명한데 지난 가을 떨어지지 못한 플라타너스 잎들이 봄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늦어버린 것들에 대해

늦어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전철역 앞 요즘도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하며

우산을 쪼그려쓰고

우산이 더 작았다면 맘껏 몸을 움츠려 작은 고무공처럼 몸을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른 봄밤을 걷다가

내가 가는 곳이 비오는 봄밤보다 더 어둡고 조용한 땅속 같은 곳일 거라고 생각하며

난 그 고요를 종일토록 그리워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종일의 목표가 나의 절대고요세상으로 들어가고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보도블럭의 틈새에 하이힐의 뾰족한 굽이 끼지 않도록 뒤뚱거리며 걷는 내가 참 웃기다는 생각도 같이 하며

 

현관문을 들어서서

아침에 이 옷 저 옷 입어보느라 던져 놓은 선택에서 제외된 옷들이 흩어진 방바닥을 가려디디며

아침에 골라 입은 옷이 하루 종일 지겨웠다고 벗어던지고

다시는 입지 않을 듯이 벗어던지고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하며

오늘 종일 내 몸에 묻었던 세상의 기운을 떼어내야만 오늘밤을 무사히 잘 지낼 수 있을듯이 목욕탕이 마치 열탕소독기나 되는 듯 뜨겁게 뜨겁게....

 

8시가 되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되어 깼다.

옆에 둔 일기장에 일기를 쓰고 다시 잠을 청한다.

언젠가 어느날에는 새벽한시에 쓴 일기들을 내가 읽으며 너 그러고 살았었니 하고 추억할 날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미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

 

아침 7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드라이어 약풍으로 머리를 말리고 화운데이션으로 잡티를 가리고 어제 선택되지 못한 옷들 중에 하나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한다.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했고

채소좌판 청년에게 인사를 했고

떡뽁이 아저씨는 여전히 외면했다.

 

 

고요히, 입다문 것들.... 이라는 시에 마음을 준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갑자기 지난 일요일 아르바이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참 성격 좋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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