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내일을 여는 작가 당선작
꿈의 항해
정영우
캔 뚜껑을 열자 고온다습한 북태평양의 고기압이 터져 나온다
내색은 안했어도 냉장고 구석에서 오래도록 숙성된 꽁치통조림에서 난
북마리아나 해저의 산호초가 나오길 바랐다
생명을 잉태하는 아름다운 무덤
그 신비로움에 반한 꽁치의 무리가 숨어들어가
산호의 푸른 촉수로 변해 나오길 바랐다
내가 촉수에 빨려 들어가고 그 속엔 사이판의 바닷가
절벽 밑에 숨은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어
獨自의 왕국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꿈꿨다
에메랄드와 비취의 원석이 바다색을 물들이고 있는 그곳에서 난
맘먹은 대로 사랑하고 버리고 편안히 긴 잠을 자다가 문득
투명한 물고기가 되어서 파도를 튀기는 살빛처럼 날아가고 싶었다
없는 것처럼 있는 쓸쓸함의 저편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그대의 베갯맡 자리끼 속에서 줌인zoom in 된 여객선의 상갑판
그대처럼 나도 목멘 꿈을 조타하고 있다
폭우가 내린다
꽁치의 울음소리가 가공되어서 雷雲이 되었다
그대와 내가 저장시켰던 사소한 그리움이 그렇게 나타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흩치고 지나가는 생소한 바람
그걸 견뎌야한다
해수 海水
그 여름 삼량의 하늘은 해를 보기 힘들었다
장마는 너무 길었고 소금창고는 인부들의 눅눅한 입담배 연기만
가두었다 인부들은 식은 밥덩이를 삼켰다가 염전바닥에
토했다 그것이 소금물의 앙금처럼 보였다
인부들은 뻘로 나가 뒹굴었다 킬킬대며 바람을
뛰어다녔다 나도 그들과 같이 뻘에서
뒹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때에
그녀를 보았다 나는 떠나가고 그녀는 떠나오고
그렇게 그녀가 나를 受胎했다
그녀는 신비롭고 사나운 난바다의 소용돌이와
음전한 포말을 같이 쏟아 놓았다
뻘밭엔 무수한 길이 놓였고 길마다
몽환의 문을 달고 있었다 어느 문을
열어도 지상의 奴役은 찾아볼 수 없어서
달콤한 낮잠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나에게서 헤어지는 피붙이의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포근한 아기집이었다
삼량 염부에 닿은 암석펄
서해의 물미막대기바람이 몰아치는 동지 가까운 날
따개비와 거북손이 달라붙어있는 바위틈에서
그녀가 날 낳고 있다
居住
왕십리에서 전농동으로 이사를 갔다
주민등록은 그대로 두고 책상과 책장만 들고 갔다
책만 보다가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자고
배봉산 샘물로 텃밭을 일궈서 생채로 연명할 작정이었다
내 주민등록은 왕십리에 남아서
황학동 양념곱창도 사먹고
양지사거리 전어무침도 사먹고
조간신문에 끼어온 광고전단지를 모아 내 빈 서재 천장을 도배하고
드럼세탁기에 아내의 속옷과 함께 세탁될 요량이었다
왕십리에 있는 주민등록이 전농동에 있는 내게 기별을 보냈다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가는 本家入納의 편지를 몰래 쫓아가
늘 가슴에 두근거리는 동요가 耳鳴처럼 따라붙던 아득한 나의
유년 그 요새를 찾았다는 것이다
왕십리도 전농동도 아닌 그곳
섬그늘 따개비집 그곳의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곳엔 기가 막히게도
내 유년이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 기절할 일은 그곳으로 가는 길은 만화경 속의 구름다리 같아서
그동안 내 머리통에 빼곡히 쌓아진 沒기억의 장작더미를 하나씩 내려 태우고
잿물을 만들어 걸음마다 발자국을 찧으며 가야 한다는 것이다
뭍고등어
은퇴한 늙은 어부는 밤이면 포구로 나갔다
간혹 밤으로 등 푸른 고깃배들이 들어왔다
그 고깃배들은 오래된 치부책 같은
거문도나 청산도의 波市를 그물에 담아 왔다
그때마다 늙은 어부는 그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어부가 波市를 뒤지며 단 소주를 뿌려주면
성깔을 부리며 죽어갔던 등 푸른 생선들이 살아났다
등 푸른 생선들은 난바다의 파도를 토해냈다
늙은 어부의 주름진 손등위로 깊은 바다 속이 드러났다
그 고요 속에서 파란 광채의 무리가 지더니
늙은 어부를 서서히 삼켜갔다
그런 밤마다 포구는 바다기슭이 우는 소리로 들썩거렸다
그 소리들은 오래 전부터 태업하고 있던 선술집의 부엌 불을 켰고
새벽까지 드문드문 찾아오는 손님들은 영문 모르고 공술을 받았다
늙은 어부의 큰아이가 벌써 이태 째나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난바다의 풍랑이 그렇게 기슭까지 밀려와 우는 거였다
독점은 늘 울타리였다
그날,
서곶 독점 옹기가마 입구에 발렸던 진흙이 꼬득꼬득 실금을 퍼뜨리며 96년산 포텐샤의 윈도우를 덮었던 그날, 난 그 밀폐를 깨지 말았어야했다. 독점에서 수비질하던 태수, 잿물을 개던 외팔이, 피움불 쏘시개로 잎담배를 붙이던 상구아빠, 그들이 검정이 입혀진 단지에 담겨져 차 안에 있던 걸 눈치챘어야했다. 가마를 열고 익은 그릇을 꺼내는 날이면 이악스럽게 자리를 매기던 그네 마누라들의 몸빼바지에 묵은 창솔냄새가 차 안에서 진동하는 걸 알아차렸어야했다. 독점 일당잡부 희자가 “헤어질 적엔 꾸울하게” 라며 내민 손에 묻혔던 유약이 시트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것을 먼저 봤어야 했다.
꿈에 독점을 떠나오면서 허방다리에 감춘 약속들이 창불에 녹아내렸다. 희자가 목을 매고 난 후, 상구아빠는 거실조명을 헤엄치는 은어가 되어 내 귓속을 파고 들어와 산란자리를 폈고 외팔이는 뜨거운 이명耳鳴이 되었고 태수는 구겨진 소파가 되었다. 밤길 점멸등이 시루떡처럼 포개져 내 시야를 빨아드리고 난 도침陶枕위에 올려진 날그릇처럼 자꾸만 옆줄을 맞추고 있었다.
그날, 세숫물을 먹고 있는 생질꾼을 거울에서 본 그날, 샤워기가 불질을 돋우던 그날, 현관문이 쨍그랑거리던 그날, 내가 드디어 항아리로 구워진 그날, 96년산 포텐샤가 사실은 서곶의 가마 칸이었고 질펀한 오줌바닥에 찧어진 내 발자국을 기물로 얹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까시나무의 집
동부시립병원 501호 병실에 아까시나무 한그루 누워있다
링거팩을 침상에 묶고 젖물을 받아내면서
전지剪枝를 너무 많이 했어요 젖무덤이 다 없어졌어요
젖을 물려야하는데요
그 집 정원 해수조에 넣어둔 무녀리 새끼돌고래에게 젖을 물려야하는데요
옹알이를 들어보니까 내 하얀 꽃잎을 어미의 손으로 알던 걸요
그 집 뒷터 방목장에 풀어 논 거세된 숫염소에게도 젖을 물려야하는데요
가끔은 풀뿌리에다 코를 비비며 나의 꽃향을 찾던 걸요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가둬 놓을 수 없어요
그 집은 바다에도 땅위에도 없네요
가두리수컷들을 양육할 내 젖무덤이 사라지는 순간
그 집도 없어져버렸네요
지난 장마에 흙탕물 속으로 떠다니던 빈 벌통들이
내 몸의 담벼락이었군요
내가 그 집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집이
만화경 속의 색종이처럼 있었던 거예요
유방암을 앓고 있는 아까시나무가 쏟아낸 젖물이
링거팩을 넘쳐흐른다
병실엔 아까시향이 그득히 번지며
꿈의 거푸집이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있다
정영우시인의 2006년 당선작들이다.
오래 삭은 내가 풀풀 나는 시들이다.
묵직함.
한 행 한 행을 떨어뜨려놓아도 단편소설 하나쯤의 이야기가 있을 듯하다.
'내몸의 담벼락이었군요.'
'꿈의 거푸집이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있다.
'그 밀폐를 깨지 말았어야 했다.
.
.
.
어떤 행을 마구 옮겨 놓아도 시인의 말이다.
시인의 말은 발견임과 동시에 창작임을 ....
신인상 당선시.
시들이 사방으로 튀는 때라고 한다.
정영우시인의 이 시들은 무게 중심처럼 느껴진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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