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읽던 시절
장석주
내가 카프카를 읽던 시절은 지금보다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르고, 촛불들은 더 밝았다. 세상의 물들은 더 맑고 여자들은 성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듯 더 해맑게 웃었다. 그때 나는 오래된 한옥들이 있던 서울의 명륜동(明倫洞)에 살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남보다 삼강오륜에 더 투철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외풍이 센 그 방은 겨울이면 윗목의 물그릇이 꽝꽝 얼곤 했다. 그 얼음의 방에 엎드려서 카프카가 여러 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어머니라고 부른 프라하의 거리들을 상상하며 그의 단편들을 필사하곤 했다. 카프카는 음울한 기질의 사람이 아니다. 카프카는 시골의사인 외삼촌 지크프리트 뢰비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 거기서 젊은 누이들과 자연 속에서 거의 완전한 행복을 누리곤 했다. 카프카는 아직 십대 후반이다. 그곳에서 오토바이도 타고 수영도 하고 당구도 치고 맥주도 마시고 연못가의 건초더미에서 오랫동안 자기도 했다. 날씨가 좋으면 카프카는 젊은 누이들과 숲으로 춤을 추러가곤 했다. 나는 회색의 날들을 춤추러 가는 카프카를 떠올리며 견뎠다.
카프카는 말했다. “문학이 주는 묘하고 불가사의한 위안, 어쩌면 해로울 수도, 해방을 안겨줄 수도 있는 위안, 그것은 살인자의 대열에서 뛰쳐나가는 일이며 행위를 관찰하는 일이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었던가 ? 나는 문학에서 불가사의한 위안, 혹은 기쁨의 오르막을 구한 것일까 ? 청순함과 미숙, 열정이 혼재되고 뒤섞인 스무 살 무렵. 나는 종이와 필기구가 있으면 나는 무언가를 썼다. 집의 다락방에 몸을 웅크리고 들어앉아 쓰고, 친구의 하숙방을 떠돌며 쓰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시립도서관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도 썼다.
질풍노도와 같은 20대 전반기의 내 삶을 상징과 제유 속에 압축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잠자면서도 늘 절벽을 보았던 한 청년의 변방의 삶, 휘어지는 빛, 우연, 어처구니없는 자명성,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자들이 당당하게 내민 뾰족한 젖가슴들, 바다에 떨어지는 눈발, 눈 녹아 질척거리는 오래된 골목길들, 둥근 감자의 눈에서 나오는 노란 싹들, 누렇게 변색되어 끝이 부스러지던 책들....... 나는 그것들에 대해 얘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강원도 내륙 지방, 황량한 소읍들을 유목민처럼 헤매고 다니다가 불현듯 집에 돌아와서 신문사에서 보낸 전보용지를 받았다.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를 받아들고 내 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그 문을 닫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제 그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는 카프카 소설의 필사와 함께 보낸 20대 시절과 함께 영원히 흘러가 사라질 것이란 예감이 스쳤다.
내게도 사랑이 있었던가
불 같이 지나간 사랑, 단 한 번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왜 없겠는가 ! 그것 없이 시를 써왔다면 내 시는 종이에 그린 유치찬란한 무지개, 혹은 헛된 백일몽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어느 날 ‘새’가 내 가슴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새’는 스물 한 살이고,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새’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이미 너무 늙은 듯싶었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웠다. 사랑은 정본이지만 불륜은 복사본이다. 사랑은 종신형이지만 불륜은 벌금형이다. 사랑은 심해를 달리는 고래의 붉은 눈이지만 불륜은 새장 속에 갇힌 문조의 맑은 눈이다. 시작은 알 수 있으나 끝은 알 수 없는 미궁이 사랑이라면, 불륜은 끝이 보이는 시작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극단에는 늘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갓 피어난 천체처럼 반짝이는 너는 스물 셋 / 나는 살(煞)이 낀 스물 아홉의 나이 / 멀고 먼 하늘에 역병처럼 노을이 돌면 / 짐승처럼 쫓겨 하룻밤 묵어가는 시골 여인숙 / 이곳을 나서면 내일은 또 어디랴 // 밤이 깊다, 세상은 커다랗고 정다운 여인숙 / 인생은 하룻밤 짧은 꿈이라고 / 너는 흘러간 날들처럼 웃고 있다 // 잠깐이다, 날들이 가고 / 마침내 낯선 세상으로 흘러가야 한다! // 그렇게는 못산다, 미쳐서도 못산다! / 아아 죽자, 청산가리 먹고 청산가리 먹고 / 타는 노을은 탄가루 날리는 서녘 하늘에 두고 / 시골 여인숙에서 죽자! / 타는 여름날이 끝나기 전에 죽자!
_ 졸시,「여인숙」
그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아프다. 모든 진짜 사랑은 불같은 사랑이다. 모든 진짜 사랑은 단 한 번의 사랑이다. 불의 고통을 품어 안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유사한 다른 그 무엇일 것이며, 단 한번이 아닌 것 역시 그러할 것이다. 기억과 망각의 저 뒤편에서 나는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잠은 잔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지나간 사랑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죽은 사랑이 아니라 늘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이다. 뜨거운 불은 모든 것을 녹인다. 불꽃의 혀가 춤추는 용광로의 고열 속에서 쇠가 녹아 붉은 액체가 되어 흐르는 광경은 경이롭다. 그 무엇으로도 허물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쇠조차 불은 간단하게 녹여낸다. 불은 견고한 물질적 현존을 녹여내서 다른 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불의 힘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세고 무차별적이어서 그것을 거스르려는 자, 저항하는 자를 간단하게 제압한다.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것에 저항하는 내부의 역동적 에너지조차 나중에는 불에 가세해서 본디의 생리와 한계를 간단히 하며 주체를 변화시킨다.
누가 지금 /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 누가 지금 /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 그대 꿈은 / 처음 만난 남자와 /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 한 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 그대 고운 바람결 /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_ 졸시,「애인」
‘새’와 나는 헤어졌다. ‘새’는 애절해서 자주 울었고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다고 호소했다. 어느 밤인가 ‘새’는 내가 사는 동네를 헤매 다녔다. ‘새’가 아는 건 오로지 내 차밖에 없다. 그 가는 끈에 의지해 나를 찾았던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나는 ‘새’에게 죄를 지었다. 나는 ‘새’가 헛된 방황을 하게 했다. ‘새’는 나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갔다. ‘새’는 숨 쉴 만한 숲을 찾아 떠난 것이다. 나는 ‘새’를 이해한다. 이 시는 ‘새’와 헤어진 뒤에 썼다. ‘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진짜 사랑은 여러 번일 수 없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사랑이 평생에 걸쳐 단 한번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여러 번 사랑을 겪는다 하더라도 사랑은 단 한 번의 유일무이성, 그 절대성 속에서 발견되고 겪어낸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_ 졸시,「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시는 ‘새’와 헤어지고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 썼다. 아직도 ‘새’는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새’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사랑은 늘 그것을 겪고 난 뒤 기억의 현재진행형 속에서 추체험하는 영혼의 율동, 기억의 몸짓이라는 것이다. 말하는 사랑은 늘 현재에 있지 않다. 현재의 사랑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느낌과 사유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오열과 같은 것.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몰입이자 초월이고, 있음과 없음이 태극의 문양처럼 하나로 얽혀 있는 상호적 교호로서의 죽음이다. 현재라는 중심 속에 있을 때 살아지기는 하되 기억의 작용으로서 사랑은 사유되지는 않는다.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게 될 때 보이는 것, “아하, 내게도 불같은 사랑이 지나갔구나 !”, 라고 알아차려지는 것이다. 우리 영혼엔 사랑이 지나간 수레바퀴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지나간 것들과 지금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대화, 심미적 회통(會通)의 겹을 보여준다.
지나간 것과 새로 오는 것 사이에서
‘새’를 아주 잊은 줄 알았다. 더 이상 저녁들은 슬픔의 까닭이 되지 않았으니까. 씩씩하게 밥 잘 먹고 개망초와 같이 잠도 잘 잤으니까. 이젠 새 사람 만날 거란 기대도 가졌다. 새 구두를 신고 ‘새’와 걸은 길을 혼자 걷는데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니까. ‘새’와 함께 가서 음악을 들었던 곳에 혼자 커피도 마시고, ‘새’와 함께 가서 연극을 보았던 소극장에서 혼자 연극도 보고, 뭐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 많은 날들이 지나갔으니까.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를 수도 없던 날 위로 햇살, 비, 눈........셀 수 없이 지나갔으니까. 옛날의 불꽃은 아주 꺼졌다고 믿었으니까. 마음은 재가 되어 더 이상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름 지나 다시 가을이 되자 내 안에 검은 눈동자들이 촘촘하게 돋아났다. 아아, 살아있었군 ! 해바라기엔 검은 씨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그 해바라기의 검은 씨앗들은 그 불에서 까맣게 익어버린 ‘새’를 보고 싶은 내 눈동자들이다.
잎을 가득 피워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의 괴로운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 오는 야생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죠.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 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이죠. 나는 오로지 어둠 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 왔어요.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조건이죠.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가는 죽은 전갈이죠. 내 물병자리의 생은 이제 일인분의 고독과 일인분의 평화, 일인분의 자유를 나의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기 당신의 자리에 서 있으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바닷가에서 밤하늘에 쏟아지는 유성우(流星雨)를 함께 바라봤지요. 그때 당신과 나의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_ 졸시, 「당신에게」
‘새’가 떠난 자리는 마치 독극물이 쏟아진 듯해서 새로운 사랑의 싹이 트지 않았다. 새로 오는 사랑에서 나는 늘 ‘새’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림자들은 마음을 흔들지만 그것은 그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람과 같아서 손에 쥘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허망함 때문에 자주 절망했다. 나는 혼자서 충분히 고독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 고독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지나간 사랑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랑은 서로를 은폐물로 삼는다. 과거는 현재 속에 숨고, 현재는 과거 속에 숨음으로써 그 생리와 한계, 실체는 가려지면서 진상은 파열하듯이 드러난다. 사랑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사랑이 궁극적으로 유예된 이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숨가뿐 사랑이라도 시간을 이기는 사랑은 없다. 모든 과실에는 까만 씨앗이 박혀있듯이 모든 사랑에는 이별이 숨어 있다. 그 씨앗이 있기에 또 다른 사랑이 싹트는 것이다.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나간 사랑은 현재의 사랑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랑은 이미 당신의 몸과 영혼, 삶의 중심을 관통하며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시간은 원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를 알 수 없는 먼 이방의 항구로 데려가 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잊힌 의미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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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
장석주
1
신생의 아이들이 이마를 빛내며
동과 서편 흩어지는 바람 속을 질주한다.
짧은 겨울해 덧없이 지고
너무 오래된 이 세상 다시 저문다.
인가 근처로 내려오는 죽음 몇 뿌리
소리없이 밤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2
회양목 아래에서
칸나꽃 같은 여자들이 울고 있다.
증발하는 구름같은 꿈의 모발,
어떤 손이 잡을 수 있나?
3
밤이 오자 적막한 온천 마을
청과일 같은 달이 떴다.
바람은 낮은 처마의 불빛을 흔들고
우리가 적막한 헤매임 끝에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 속에 설 때
가을 산마다 골마다 만월의 달빛을 받고
하얗게 일어서는 야윈 물소리.
4
어둠 속을 쥐떼가 달리고
공포에 떨며 집들이 긴장한다.
하나의 성냥개비를 켤 때
또는 타버린 것을 버릴 때
더 깊고 단단하게 확인되는 밤
쥐떼의 탐욕의 이빨이 빛나고
피묻은 누군가의 꿈이 버려져 있다.
5
하오 3시 바다는 은반처럼 빛난다.
흰 공기 속을 통과하는 햇빛의 정적
바람이 분다, 벌판에
흰 빨래처럼 처박힌 저 어두운 바다가 운다.
포악한 이빨을 드러내는 바다, 하오 4시
위험한 시간 속으로 웃으며 뛰어드는 아이들.
6
전파는 다급하게 태풍 경보를 예보하고 탁자의 유리컵에는
바다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폐쇄된 전 해안
새파랗게 질린 풀들이 울고 그 풀들 사이에 누군가의
거꾸로 처박힌 전생애가 펄럭거리고 있다.
오, 병든 혼,
아이들은 폭풍 속을 뚫고 하얗게 떠있는 바다로 달리고
내 붉은 핏톨은 쿵쿵 혈관을 뛰어 다니며 울부짖고 있다.
7
햇빛 그친 낡은 문짝에 쇠못들이 박혀 녹슬고 있다.
잊혀져 가는 누군가의 이름들.
8
바람은 오늘의 풀을 흔들며 지나가지만
흙 속에 숨은 풀의 흰 뿌리를 다치지 못한다.
9
통제구역 팻말이 꽂혀 있다.
끝없이 거부하며 어둠속으로 쓰러지고
풀뿌리 밑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잠들곤 했다.
팻말 뒤에서 펄럭이는 막막한 어둠
어두운 창너머 벌판에는 비가 뿌리고
잠자면서도 절벽을 보았다. 밤마다
시간, 오오, 가혹한 희망과 다정한 공포여
소멸의 이마를 스치는 푸른 번개
서치라이트의 섬광만 미친 짐승처럼
이빨을 번득이고
나는 꿈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질주를 하며
땀을 흘리고 울었다.
아, 1975년 여름
절벽에 부딪쳐 산산이 튀어오르는
파도 조각처럼 부서지고 싶었다, 그때.
(1979년 조선일보)
-장석주시인은 위의 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로 1979년에 등단을 했다.
얼마 전 '시골동네아저씨'라는 블로그에서 나의 블로그 '필꽂히는시' 중에 한 꼭지를 스크랩해 갔다.어디에서 뭘하고 있나 찾아보니, 시의 주인이신 '장석주'시인의 블로그였다. 문제는 그 시가 아니라, 블로그 글 중에서 완전 필이 꽂혀 버린 글이 있었다.
맨 아래에 있는 '카프카를 읽던 시절'을 클릭하면 원문을 복사해 두었다. (빽빽한 글씨에 눈이 익숙해지는 순간, 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잠시만 눈이 활자에 익숙하게 바라보면 된다.)
중년을 넘긴? 시인이자 평론가가 자신이 살아온 한 부분을 담백하게 적어두었다. 온라인 상으로는 긴 듯이 느껴지지만,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짧은 글이다. 시인의 사랑이야기이다. 그가 '새'라고 부르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새'는 그가 인용한 자신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시간을 보냄에 따라 '새'는 변해간다.
갈매기이기도 하고, 학이기도 하고, 소쩍새이기도 하고, 제비이기도 하다. '새'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나, 새는 다른 모양으로 시인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은 드러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한다.
시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차고 넘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눌러 눌러 담아둬도 넘쳐서 컵밖으로 어쩔 수 없이 흘러내리는 불가항력의 것이 아닐까? 사랑은 펌프에 마중물을 붓 듯 억지로 끌어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안되는 것이다. 누르고 두드리고 덮고 해도 흘러나와 들켜버리는 사랑,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사랑, 참을 만한 사랑, 들키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누구의 사랑이든 타인의 사랑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이다.
시간이 지나, 흘러내린 물을 쓸어담고, 혹 그대로 말라버리고, 난 뒤, 한 컵의 물로 남았을 때 말해주는 시인의 담담한 사랑이야기.
솔직하고 담담한 말투.
'사랑'이라는 뜨거운 이야기 거리를 차갑고 담담하게 그리고 건조하게 풀어나간 것이 마치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누드'를 보는 듯하다.
자신의 옛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필터링없이, 그러나 시로 표현되었던 시간마다의 감정결은 마치 뭉크의 '뼈가 있는 자화상'을 보는 듯 했다.
떠도는 病
장석주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다.
아아 오늘 밤은 잠들면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
불꽃이란 불꽃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밤, 가도가도 다시 밤
시퍼렇게 눈 뜨고 어둠 속의 어둠으로 발을 옮기며
가도가도 찾을 길 없는 내가 찾는 길은?
늪처럼 깊은 어둠 속을 손 허우적이며
살아 있어도 살아 있어도 더럽기만 한 목숨아.
거친 바람속에서 집들이 무릎을 꿇고 운다.
밤마다 눈뜨는 눈물을 가슴에 아끼며
몸부림치듯 몸부림치듯 오욕의 삶을 허락하며 내가 가려는 곳은?
혹한의 겨울새벽 언 땅바닥에 엎어지며
가슴에 벼르던 칼날 다시 밤새워 날을 세우며
나는 울었다. 더럽혀진 뿌리여, 외로운 분노여.
여기가 어딘가, 내가 잠들려는 여기가 어딘가.
욕된 삶을 저주하고 시궁창에 헛디딘 발을 증오하고
이 병든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다.
어둠 속의 없는 길을 찾으며 말없이 떠돌지라도.
- 장석주 시인의 '완전주의자의 꿈'이라는 시집에서 가장 필이 꽂히는 시다.
1982년에 나온 시집인데, 사랑의 전?후?시는 젊음일 땐 어둠이다. 그리고 말간 중년이 되면 햇빛으로 나온다. 그래서 또 中庸之美를 이룬다. 절묘하다.
그럼 비교적 최근작.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 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길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한없이 가버리자고..... 그런다.포기했나보다.
남들이 불륜이라고, 사랑이라고 실컷 떠들어댈 때도 묵묵했던 사랑이다.
이제 모두 조용한데, 시인은 한없이 가버리겠단다. 힘겨웠던 기억만 남았단다. 잘 생각하면 아닐텐데.....괜한 핑계.역시 시는 시이다.
시는 산문보다는 솔직하지 못하다.
시는 소위 말하는 몇 몇 정신병력이 있음직한 시인들 빼고는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못한다. 타인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배려하지만 말이다.
시인이 올린 산문이 아래에 있다.
적어도 내게는 모처럼 읽는 멋진 글이었으므로 그저 인터넷상에 함부로 돌아다닌 것을 원하지 않는다.스크랩을 막아둔다.
혹 필요하다면 원문으로 찾아가시길...... http://blog.daum.net/kafka7606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누드'
-뭉크 '뼈가 있는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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