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見聞錄

기행일기-12

by 발비(發飛) 2006. 9. 26.
2006/ 08/ 02

-꽃을 찍다.
Himalya 숙소를 지나자 시작된 고산증세로 앉고 설 때마다 띵한 머리를 잡고
꽃을 찍는다.
때로는 얼굴을 내게 보여주며 활짝 웃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리며 햇빛에 그의 색감을 비춰주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얼굴을 뒤로 돌려 등판만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포즈를 하고 있는 꽃들을 정면에서 찍기도 하고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찍기도 하고,
혹은 내가 꽃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기도 한다.
얼굴을 나와 마주하고 있는 꽃들이야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만나겠지만,
이미 얼굴을 옆으로 두거나 뒤로 둔 꽃들은 그에게 맘 돌릴 시간을 줘야 한다.
이리저리 웃는 얼굴을 찾기 위해 혹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각을 찾기 위해 옆을 돌면서 어르기를 한참하면 꽃들은 대개 내게 얼굴을 보여준다.
하지만 간혹 어찌해도 얼굴을 돌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저 그의 뒷모습을 찍으며, 정말 내가 맘에 들지 않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꽃들을 찍고 놀다 포터 라쥬가  보이지 않아 비에 젖은 산길을 뛰었다.
난 꽃들에 온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혹 내가 그들 중 한 송이라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면 혹 섭섭하다 생각할까 혹 밉다고 생각할까 싶다.
 
-길을 잃다.
꽃에 정신이 팔려 앞 사람과 많이 떨어졌나보다했다.
길을 따라 가다 계곡이 나타나면 다리를 건너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길이 없어진 것이다.
길이라고 찾아간 길에는 길이 없고 꽃들만 만발한 것이다.
꽃들 사이에 난  길을 따라 10미터쯤 가자 그 길마저 없어진다.
이 길은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되돌아나왔다.
확실한 길이 보이는 곳까지 말이다.
다시 길을 찾아본다.
또 그 길을 따라 움직인다.
길이 확실히 맞는 싶었다.
그런데 그 길이 아까 갔던 그 길인 것이다.
다시 좀 더 올라가면 끊어진 길이 나올까 싶어 좀 더 올라가본다. 아니었다.
다시 되돌아 나왔다. 그렇게 세 번씩이나.
안나푸로나에서 나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나.

사고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나의 실종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의 실종으로 가장 고통 받을 사람은 누구일까 .
누구처럼 그냥 잊혀질까. 


기다리기로 했다.
Deurali에서 쉬다가 뒤에 출발한 미국팀을 기억하고는 그 팀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곳에 혼자 있었던 시간이 물리적인 시간으로라야 10분이 채 안 되었을 것이지만 내게는 반나절은 된 듯싶었다.
사방이 하얀구름에 싸였다.
계곡의 물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빙하 내려앉는 소리에 둘러 싸였다.
구름 속에 갇히고 물속에 갇혀서 수많은 생각을 하며 있는데 미국팀이 보이는 것이다.
엄청 긴장을 했었는지 그나마 짧은 영어도 나오지 않고  길을 잃었다는 말 밖에 못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내 앞에 하얗게 드리워졌던 구름인지 물안개인지가 걷히면서 바로 앞에 나무 다리가 보이는 것이다.
바로 앞의 다리를 보지 못한 것이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치면 바로 앞의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것 말이다.
난 민망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라 갔고, 나를 기다리던 포터 라쥬를 만났다.
그것으로 나의 짧고 긴 순간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Machapuchare Base Camp에서 설산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Machapuchare봉은 네팔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봉우리라 정식등반을 금지하는 곳이라는데,
그 모양이 물고기의 꼬리같이 뾰족하다고 해서 영어로는 'FISH TAIL'이라고 부른단다.

네팔인들이 기도를 하는 산, 난 아마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아서 볼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아주 간절히 그들처럼 기도하는 맘으로 이 곳으로 올라왔다면 혹
Machapuchare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난 그저 안나푸로나 전망대 가는 길의 Machapuchare Base Camp를 간 것 뿐인 것이다.

난 그저 
Annapurna Base Camp를 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람들은 Machapuchare Base Camp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으니, Annapurna Base Camp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무겁게 발을 옮긴다.
미리 뒤숭숭한 분위기다.
3박 4일만에 다들 힘빠진 모습으로 정상을 향했다.


사실, 난 마차푸차전망대에선 고산증세가 더욱 심해져 머리를 잘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무엇때문에, 어디까지, 왜 이 곳에 오르려 했는지 생각따위는 나지도 않았다.
얼굴부터 부어오르더니, 손과 발이 모두 팽팽하게 부었다.
Machapuchare Base Camp에서 어떻게 Annapurna Base Camp까지 걸었는지 어떻게 사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눈 앞에 경사각이 낮은 초원같은 곳에 온갖 색과 모양의 꽃들이 나의 시야 180도를 다 덮고 있었다는 것만 분명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발을 보고 걸으면, 발 아래 온갖 모양의 꽃이 깔려있고,
가끔 고개를 들면 눈 앞에는 초록잎들위에 온갖 색들의 꽃이 깔려있었다.
우기라서 사람들이 없는거라 했다.
우기라서 안나푸로나의 멋진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난 안나푸로나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가장 아름다운 꽃들로 만들어진 꽃밭을 보았다.
하얀 구름 속에 비에 젖은 초록 그리고 온갖 색들의 꽃.
존재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었다.

정신없이
Annapurna Base Camp에 오르자, 앞서 온 독일남자 한 명, 미국인 두 명, 그리고 우리다.
사방이 하얗게 구름에 싸여 있어 밖에 나갈 생각을 앉고 따뜻한 레몬차로 추위를 녹이고 있다.
레몬차를 큰 컵으로 한 컵을 먹었지만, 두통은 멎지 않았고 추위때문에 점점 더 정신이 혼미해졌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한국분은 '이래서 어떡해?' 그말만 계속이다.
난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외투에 침낭에 이불을 몇 겹이나 덮고 누웠다.
눕자 말자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 마치 땅 속으로 가라앉는 듯 잠도 아니고 기절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었다.

-지금 너에게

가끔 머리가 아파.
그럼 난 나의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줘. 한참 나의 머리칼을 쓸어줘.

너 기억하니?
아주 잠깐 너의 손이 나의 머리칼을 쓸었지.
그저 스친 거겠지.

머리가 아파.
너무 머리가 아파.
너무 너무 머리가 아파.

딱 손 하나가 있어 내 머리칼에 올려준다면,
그 손이 따뜻한 손이라 나의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아 잠에 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밖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두드린다.
구름이 걷혀
Machapuchare봉이 걷히기 시작했단다.
일어나야 했지. 원래 그러기로 한거였지. 무슨 힘인지 모를 일이다. 일어나
Machapuchare봉을 본 것 같다. 그 와중에 카메라를 들고서 말이다.


Himalya (1h) - Deurali (2h) - Machapuchare Base Camp(3700m, 1 1/4h) - Annapurna Base Camp (4130m)




'見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곡- 밤나무길 신부님 1  (0) 2006.10.03
[윤효간] 피아노와 이빨  (0) 2006.09.30
기행일기-11  (0) 2006.09.26
기행일기-26  (0) 2006.09.24
기행일기-25  (0) 2006.09.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