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그리스도와 마리아, 마르타
- 루가복음 10장 38절 ~42절-
예수 일행이 여행중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느라,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 데 이걸 보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라고 일러주십시요."
그러자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면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 몫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2006년 9월 20일
오늘 다시 몫이라는 말에 끌려 지난 1월의 글을 아래에 붙여놓는다.
같은 것을 두고 변해가는 모습이 재미있다. 오늘 난 몫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걸까.
어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감히.....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뵈었다.
항상 그렇듯 할아버지 사장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멀뚱이 보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신다.
잘 쳐 다녔냐?
미친 짓 하니 좋더냐?
나의 대답, 네.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오늘 모임이 있기는 한데, 가기 싫던 차에 잘 됐다.
그래도 가셔야죠.
그럼 같이 갈래?
싫어요, 제가 거길 왜 가요.
야 이 돌멩아, 거기고 여기고 뭔 상관이냐. 어차피 널 아는 놈도, 너가 아는 놈도 없을텐데, 야 진짜 돌멩이 아니냐...
돌멩이라는 말만 들으면 스펀지처럼 말랑해진다.
쭐레 쭐레...
정말 눈도장만 찍으시고 술집으로 향했다.
간만에 할아버지 사장님이랑 청하를 마셨다. 내 주량이 어찌 변한지 몰라 조심히 마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
초지일관, 돌멩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대리석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탄식섞인 소리도 들으며
잡석이어서 애닯다는 말씀도 들으며... 중국고사에 나오는 잡석에 섞인 옥돌도 있더라는 이야기도 들으며
혹 그럴 수도 있으니, 한 번 깨보라는, 그렇다고 되겠냐는 핀잔까지 들으며.
할아버지 사장님, 직원과 오너와의 자리가 아닌 그냥 함께 한 자리로는 처음인 듯 싶다.
자리를 옮겨 맥주집, 할아버지 사장님 간만에 말을 많이 해서 기운이 빠지셨단다.
한 참을 침묵하시더니, 가자!
술값은 1.2차 다 할아버지 사장님이 내셨다. 내가 맥주는 5000원어치 밖에 안 먹었으니 내겠다는 말에
내가 그 돈으로 너에게 술 얻어마셨다고 하겠냐? 못된 놈 아니야...역시 돌멩이!
이음아트에 낮에 잠시 들러 할아버지 사장님께 다녀오겠다고..
다시 들르겠다는 약속을 어긴 까닭에 집에 가는 길에 다시 찾았다.
대학로멤버들, 기다리다 다른 자리를 마련해 이미 술판이 벌어졌다.
장하다고 어깨를 두드린다.
이쁘다고 어깨를 쓸어준다.
20킬로에 가까운 배낭을 몇 달간 지고 다니느라 더욱 튼실해진 나의 팔뚝이 웃기다는 듯이 보신다.
굵어진 팔뚝과 검게 탄 얼굴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가움이 눈동자에 가득 실려있다.
아마 나의 눈도 그랬으리라, 다들 보고팠던 사람들이다.
대학로 멤버이면서 한동네 이웃인 분들, 우리의 기사님은 우리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긴 시간동안 한 잔의 술도 드시지 않으셨다. 난 나의 집에 안착했다.
한참을 눈을 뜬 채 멍하게 나를 보고 있었었다.
몫이라는 말이 생각난 것은 이때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중에 '그리스도와 마리아, 마르타'라는 그림이 있다.
마르타는 빵바구니를 끼고 언제나 일어설 자세로 그리스도 옆에 앉았고,
마리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옆자리을 지킬 듯이 바닥에 자리를 했다.
그리스도의 손이 마리아를 가르키면서 마르타에게 설명한다. 몫에 대해서....
어제, 나의 자리는?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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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4일
아마 3년 아니 4년전 이 성경말씀을 읽었다.
세상에는 참 좋은 몫을 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
예수님은 둘 다 있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신다,
마르타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시는 것이겠지.
앞으로 또 3년 4년 뒤 이 성경말씀을 다시 읽을 수 있겠지?
난 마르타? 아니면 마리아?
세상엔 둘 다 필요하다
2006년 1월 24일
문득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일기에 썼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일기가 생각이 났다기보다, 다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간 날이구나.
어느 날들은 내가 마르타인 줄 알았다. 좋지 않는 몫을 가지고 태어난 마르타.
그리고 어느 날은 내가 마리아인 줄 알았다. 좋은 몫을 가지고 태어난 마리아.
예수님은 그저 그렇게 말씀 하셨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그 몫으로 사는 것이니 빼앗지 말아라고...화가 났었다.
성경에서는 내세도 없다면서,
그렇다면서 그냥 몫대로 살라니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다.
투덜거리는 마르타는 불평 불만을 했으므로 감점이다.
그럼 천국과는 좀 멀어진건가?
물론 다른 곳에서 점수를 얻었겠지.
그렇지만 한 번 생으로 끝난다는 성경안에서,
그리고 천국에 가면 부모도 형제도 아무런 관계도 의미가 없는 그런 것이 존재하고 인식되지도 않는 곳이라면서...
그래서 좋은 곳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 이라는 이분법, 아니 연옥을 끼어넣는다 치더라도...
그렇더라도 지금의 몫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그렇게 속이 좀 상했다면 난 내가 마르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싶다.
갑자기 이 성경 구절이 왜 생각났을까?
나를 심문하기로 해본다.
내 몫.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면, 지금 다시 저 위의 성경을 읽었는데 몫이라는 말만 눈에 끼어든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한다,.
그 정도면 됐지! 뭐가 그리 문제가 많아!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난 오늘 실비아 프란츠의 일기를 조금 읽었고, 황인숙시인의 시집을 조금 읽었고, 또 ...
몇 권을 산만하게 뒤적였다.
실비아 프란츠의 삶이나, 황인숙 시인의 삶이나, 혹은 그들의 글.
그것들을 보면서 사람의 삶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다시 아침
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不亦樂乎아
뒤의 말이 틀리지만, 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성글고 모진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팔을 굽혀 베개를 삼고 잠을 자더라도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2006년을 살면서 고민 많고 갈등 많음의 근원이 학문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맘 먹기에 따라서는 불역락호아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르타가 노동의 몫을 가지고 태어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발밑에서 들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그런 차이가 있지만, 그 몫 안에서 즐길 수 있다면,
그저 모진 밥을 먹더라도 그 안에서 그저 즐길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의 몫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저 난 이렇게 나를 다독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 책을 읽으면서 난 마르타와 마리아가 생각났다.
길 밖을 나가면, 수백만원짜리 밍크코트에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화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에게 삶은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리고 또 길 밖을 나가면 리어커에 갈라진 손을 하고 노점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도 본다.
그들 가족이 모두 옆에 붙어 웃고 있는 모습도 본다.
그들이 감자탕 2분 14000원을 시켜놓고 네 식구가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예수님이 말하는 몫은 공자님이 말하는 품부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업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무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희노애락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노애락의 잣대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무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다시 다독인다.
실비아 프란츠가 그녀의 삶을 점철했던 파편조각과 열정은
또한 그녀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고통을 통해 느꼈을 카다프시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그녀는 아무도 즐기지 못했던 고통을 최고조로 즐기고 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의 고통 배인 산문들이나 시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자신을 대입하는 것..
그건 그녀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녀가 몰랐다면 신이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냥 몫대로 산 것이리라.
내 등 뒤에서 바람이 불기를....
그래서 난 그 바람에 밀려 힘을 빼고도 갈 수 있기를...
바람에 밀려 가는 길이 내 몫을 찾아가는 길이어서 쉽기를....
주체인 나도 , 객체인 그들도 , 주관자인 신도 모두 쉽기를...
모진 밥을 먹고 살더라도 꿀떡꿀떡 잘도 넘어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
마르타 처럼 누구의 시중만 들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기를....
바람이 등 뒤에서 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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