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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류시화] 여우사이

by 발비(發飛) 2006. 5. 5.

여우사이

 

류시화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 곳으로

 

1.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사이가 없는 그 곳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꿈꿨습니다.

이 시를 다시 읽은 오늘, 사이가 없는 관계란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라는 것은

그와 나의 사이라는 것은, 그 공간이라는 것은,

그와 나의 사이는 그와 내가 머무는 집이다.

그 집은 때로 행복한 웃음이, 때로 처철한 눈물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입니다.

 

이제 그 사이를 원합니다.

사이가 없는 사이를 원하기보다

그와 내가 각자 다른 곳에 머물며 그가 보고 싶을때 그 사이로 들어가 그의 흔적을 보고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이로 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가 보고 싶은 그를 만나기도 한다.

이젠 사이를 원합니다.

 

그렇게 변합니다.

그와 나의 사이처럼 나도 변합니다.

 

2.

 

중3 여학생이 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몇 개의 학원을 순례한 뒤, 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그 때도 힘이 빠진 얼굴을 목을 쭉 빼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 아이의 눈을 보니, 절 보고 있는데 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제 손에 들려있었던 수첩에서 시 한 편을 골랐습니다.

류시화님의 '여우사이'입니다.

"??아, 들어봐."

그리고 저는 이 시를 읽었습니다.

 

다시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 " 흠~~, 좋다!" 딱 그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린 공부를 했습니다.

여전히 공허한 눈빛이었지만, 그 공허함 뒤에 작은 심지하나 박히기도 한 듯한 눈빛을 가지고...

 

몇 년전의 이야기입니다.

문득 이 시를 보면서, 그동안  제가 읽는 시의 취향도 바꼈지만, 이 시는 그 여학생과 함께

찡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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