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사이
류시화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 곳으로
1.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사이가 없는 그 곳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꿈꿨습니다.
이 시를 다시 읽은 오늘, 사이가 없는 관계란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라는 것은
그와 나의 사이라는 것은, 그 공간이라는 것은,
그와 나의 사이는 그와 내가 머무는 집이다.
그 집은 때로 행복한 웃음이, 때로 처철한 눈물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입니다.
이제 그 사이를 원합니다.
사이가 없는 사이를 원하기보다
그와 내가 각자 다른 곳에 머물며 그가 보고 싶을때 그 사이로 들어가 그의 흔적을 보고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이로 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가 보고 싶은 그를 만나기도 한다.
이젠 사이를 원합니다.
그렇게 변합니다.
그와 나의 사이처럼 나도 변합니다.
2.
중3 여학생이 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몇 개의 학원을 순례한 뒤, 제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그 때도 힘이 빠진 얼굴을 목을 쭉 빼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 아이의 눈을 보니, 절 보고 있는데 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제 손에 들려있었던 수첩에서 시 한 편을 골랐습니다.
류시화님의 '여우사이'입니다.
"??아, 들어봐."
그리고 저는 이 시를 읽었습니다.
다시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 " 흠~~, 좋다!" 딱 그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린 공부를 했습니다.
여전히 공허한 눈빛이었지만, 그 공허함 뒤에 작은 심지하나 박히기도 한 듯한 눈빛을 가지고...
몇 년전의 이야기입니다.
문득 이 시를 보면서, 그동안 제가 읽는 시의 취향도 바꼈지만, 이 시는 그 여학생과 함께
찡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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