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한 여자보다는...
마리 로랑생
갑갑한 여자보다는
좀 더 가엾은 것은
쓸쓸한 여자이어요
쓸쓸한 여자보다도
좀 더 가엾은 것은
병상에 누운 여자이어요
병들어 있는 여자보다
또 한 층 가엾은 것은
버림받은 여자이여요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욱 더 가엾은 것은
의지할 곳 없는 여자이어요
의지할 곳 없는 여자보다도
보다 더 가엾은 것은
쫓겨난 여자이어요
쫓겨난 여자보다도
좀 더 가엾은 것은
죽은 여자이어요
죽은 여자보다도
한 층 더 가엾은 것은
잊혀진 여자이어요
마리 로랑생...
(1883-1953)
그녀는 뭘 했던 사람일까?
유화 수채화 석판화 삽화를 그린 화가였으며, 의상디자인, 무대장치를 하기도 했으며
당시 잘 나가던.. 피카소나 살몽(?)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고 지냈던
그 시대에 보기 힘든 대단한 여자였단다.
이 시는 강우식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라는 오래된 책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첫 눈엔 이 시 좀 그랬다.
인정하기 싫었다고나 할까.
아주 단순한 읊조림이나 뭐 신세한탄같은 .. 뭐 여자로서 좀 듣기 싫은 시였지.
또 한 번 더 읽어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안다. 알어!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다음 단계... 긴 숨을 쉬었다. 흐음~~~ 하고
갑갑한 여자
쓸쓸한 여자
병든 여자
버림받은 여자
의지할 곳 없는 여자
쫓겨난 여자
죽은 여자
.
.
잊혀진 여자
여자 라는 이름 앞에 놓여진 말들이 참 잘 어울린다.
갑갑한 남자, 쓸쓸한 남자, 병든 남자, 버림받은 남자, 의지할 곳 없는 남자, 쫓겨난 남자, 죽은 남자, 잊혀진 남자....
뭐 이렇게 써보면 불쌍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뭐랄까...
이건 뒷 배경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남자에게선 뒷 배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남자앞에 붙은 수식만 보일 뿐 그것으로 불쌍한 뿐이다. 현재의 남자 모습만 보인다.
그런데 여자들은 어떤가? 무슨 사연일까?
여자는 프랑스나 우리나라나 답답하게 여겨지나?
흔히 듣는 말 "아이고 이 답답한 여자야!" 이건 너무 흔한 말.
그리고 다른 가엾은 여자들
배경스토리가 그려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돈이 없거나 뭐 3류 스토리 하나쯤은 갖고 있을 만하다.
수식어들이 붙은 여자는 내용을 밝혀두지 않아도 비슷한 배경이 그림으로 그려지다니,
여자의 삶이란 그리고 뻔한 것인가.. 싶어 다시 긴 숨이 쉬어진다.
흐음~~ 하고 말이다.
더욱 문제는 마지막에 있는 잊혀진 여자이다.
잊혀진 여자
정말 무섭다.
'지금 옆에 없어도 좋아. 눈에 안 보여도 좋아. 영원히 볼 수 없어도 좋아.
어떤 것도 괜찮은데 잊혀지는 것은 너무 싫어. '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
잊혀진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여자로서 잊혀진다는 것.
지금 내 옆에 아무도 없더라도
누군가에게 여자로서 기억된다는 것 그것을 원한다.
내가 여자로 기억되는 것을 느낄 수 없더라도 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이길 원한다.
여자임을 내세우고 싶지도, 구별되고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없으면서,
여자로 기억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이 모순이라는 근원은 '여자'라는 본능에 있다.
오래된 책 사이에서 튀어나온 시 한 편.
오늘은 아마도 내게 '여자'인 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아마 오늘이라서 이 시처럼 생기지 않은 시(^^;;)에 내 필이 꽂힌 것일 수도.....
여자라는 이름만으로도 그저 가엾기도 한... (이럴 때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 女子라고 쓰고 싶다.)
억울해 하지 말기로 한다.
좀 솔직한, 리얼리티한 여자로 태어나서 그런 것을...
(앞에 남자가 있다치면) "넌 안 그러냐?"
女子인 나!
잊혀지는 여자는 되지 말자.(불끈!)
잊어주는 여자가 되자.(불끈!)
마리 로랑생. 그녀가 그린 여자 그림이다.
이 여자가 그린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쁘고 가녀린 여자다... 다른 그림에도 그렇다.
- 마리 로랑생.숲속의 여인들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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