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파리들
조현석
한여름, 목마른 개천이 입술을 타고
흘러들었다 혓바늘을 돋게 하고
식도와 기도를 괴롭히는 잔모래
검게 말라 부서지지 않는 진흙이 드문드문 드러난
뜨거운 모래의 땅을 맨발로 걸었다
건조하다
목이 마르다
사막을 걷는 순례자다
멈추어 지지도 멈추고 싶은 생각도 없다
설사 물이 있더라도 마시지 않는다
헹궈내지도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서 가는 길이다
밀려서 가는 길이 아니다
뜨거운 모래위를 맨발로 걸어야만 털어낼 수 있다
간다. 걸어간다
입 속에서 나는 악취, 견딜 수 없어
끼어드는 추억 털어내려 하지 않았다,
사타구니의 거웃이 채 자라기도 전의
자식과 누에고치처럼 이불 속의 병든 어머니와
소식을 끊었던 아버지, 발목이 모래에서
풀려날 줄 몰랐다
무수히 내리꽂히던 갈증의 햇볕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세상에서 나는 떳떳하였지만, 끼어든
추억,
나, 세상에서 산다
냄새를 모른다
나에게도 병든 어머니에게도 소식을 끊었던 아버지에게서도 아무런 냄새는 없었다
난 그 냄새를 몰랐다
자라지 말았어야 했다
햇빛 아래 서 있지 말았어야 했다
물을 빨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여전히 냄새를 몰랐어야 했다
나 자랐고 세상에서 산다
그 곳이 멀리 있다
오랜 시간을 웅크려 울며 보내던
담장 밑의 채송화, 새벽이면 맺히는
이슬들, 다시 끼어든,
옷가슴엔 훈장처럼 빛나던 때
고무지우개로 밤새 박박 문대도 지워지지 않는
떨어지지 않는 슬픈 빛의
사금파리들
오랜 시간
이불 속에 혹은 멀리에 있는 냄새의 근원, 내 검은 살갗이다
내 검은 살갗을 도드라지게 하는 채송화 이슬의 반짝임
반짝임에 비치는 나
반짝거리는 나
검은 내가 반짝인다
검은 나를 숨기기 위해서 반짝임을 지워야 한다
쉬 지워지지 않는 반짝임
화남 혹은 기쁨
물이 줄어버린 개천에서 온종일 놀다
씻어도 씻어도 떨어지지
않는
흐린 호롱불 밑에서도 잔잔하게 빛을 내던
얼굴에 박힌 사금파리들
바라보면 언제나 낯설었던 거울 속의
나
한참을 들여다 본 거울에서 한 숨을 돌린다
물이 아직 남은 개천
물이 물이 조금씩 보인다
세상
그 곳에는 물이 조금은 남아있다
뜨거운 발로 걷기만 하다 잠시 멈춘다
한 숨을 돌리고, 검은 살갗에 붙은 사금파리 씻어낸다
떨어지지 않는다
좀 더 많은 물을 만난다
다시 씻을 것이다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씻는다
곧 사라진다. 반짝임이
반짝임이 없는 나 다시 낯설다
너무 오래
오랜 시간 사금파리가 내게 붙어있었다
어느 날 사금파리를 찾으러 다시 마른 개천을 맨발로 걷을 나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생산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방해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금파리
누구에게는 누구에게는 참 다를 수 있는 기억이라는 사금파리
엉겨붙어 써먹기도 하고, 진뜩하게 붙어 성가시기도 한 존재.
우린 그런 사금파리를 갖고 있지.
시인은 이제 좀 물러 서 있다.
입을 뗀 것이 그가 물러 서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가 사금파리 처음 묻혔던 때를 기억하고, 이제 기억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입을 떼었다.
시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것은 좀 물러 서 있다는 것이다.
아직 그 마른 건조한 그 곳에 서 있다면 그는 입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축하할 일이겠지.
맨발로 많이도 걸어오셨군요. 그러면서...
뜨거운 길 걸어오시느라 수고하셨군요.. 그러면서...
세상엔 수고한 사람들이 많다.
어느 날 멀어졌던 그 길에 다시 돌아갈 날도 있으리라 싶다.
돌다 돌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 안에 갇혀 다시 그 자리에서 사금파리 묻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겠지.
그 때쯤이면 그럴 것이다.
'지난 번에 묻었던 그 자리다. 기다리면 좀만 더 걸으면 될 것이다.
언젠간 사금파리 묻었던 자리를 그리워한 적도 있었잖아. '
내게도 그런 사금파리 하나 있다.
담에 좀 더 가까이에서 나의 사금파리 반짝임을 만나면 반가울 수도 있을 듯 싶다.
기억이라는 이름의 사금파리를 반겨할 날이 빨리 왔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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