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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백인덕] 사랑에게

by 발비(發飛) 2005. 12. 14.

사랑에게

 

백인덕

 

약국을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주인이 졸고 있는 슈퍼를 지나

비디오 가게를 지나고 머리방을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서

아이들이 버린 놀이터를 지나 네거리 신호등 앞

사랑아, 네게로 가는 길은 규칙이 없다.

놀이터를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고 푸른 등 머리방을 지나고

비디오 가게를 지나 주인이 졸고 있는 슈퍼를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약국을 지나 영원히......

 

 

[한 밤의 못질]이라는 시집 한 권을 후두둑 읽었습니다.

시인의 얼굴이 그냥 詩같은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백인덕 시인의 얼굴을 우연히 봤습니다. 시인의 얼굴이 딱 시인의 얼굴이더군요!

시 같은 얼굴을 가진 시인의 시는 어떨까?

그런 불순한 생각으로 시인의 시집을 찾았습니다. 후두둑!!! 읽었습니다.

시인의 얼굴에 쓰인 시가 너무 선명해서 활자의 시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시인의 얼굴에 적힌 시와 비슷한 시를 가장 마지막 장에서 찾았습니다.

이 시집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사랑에게'라는 시.

시가 뭐 별겁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려놓으면,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어놓은면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시인은 활자로 그림을 그려놓으면, 우리가 눈으로 보면 되지.

마음으로 본다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것!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저 눈으로 사랑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을 뒤꿈치를 보면서 사랑의 길을 졸졸 따라다닌 것 같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머리로 가슴으로 표현하자면, 무지 복잡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여주니 그렇구나 싶더라구요. 그런 거지 ... 싶었습니다.

 

백인덕 시인의 얼굴에 적혔던 시와 닮았습니다.

한 권의 시집을 후두둑 읽으며, 가장 마지막에 시인의 얼굴에 적혔던 시와 닮은 시를 찾아내서

좋은 아침입니다.

 

 

 

 

시집[한 밤의 못질]의 자서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얼굴에 슬픔이 가득할 때 마음은

더욱 현명해지기 때문에

--전도서 7:3

 

부질없이 키운 병마(病魔)를 애써

몸밖으로 밀어내며

나른한 가려움으로 밤을 건너간다.

 

아아, 죄송하다.

슬픔이 가득하지 못했던 얼굴이여!

 

2002년 2월 말

백 인 덕

 

 

시집에서 사람으로서의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자서 내지는 후기겠지요.

시인이 나누는 세상사람은 딱 두 분류일 것입니다.

시인과 사람

인정입니다.

하지만, 자서에서 시인은 사람이 됩니다.

시인이 아닌 사람으로 마음을 쓴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집은 자서가 맘을 찡하게 합니다.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시인의 이야기...

 

그저, 내 삶에게 죄송하다.....

나도 슬픔이 가득하지 못했구나.

진정 슬퍼해야 할 것에 슬퍼하지 못했구나.

현명해야 할 곳에 현명하지 못했구나.

 

죄송하다

 

오래된 약

 

비 오다 잠깐 깬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 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 격

마른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을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

 

몸에다 버려야 할 이름모를 약들이 책위의 먼지만큼이나 널려있다.

그 방에서 살고 있다

몸에다 버려야 할 약들을 바라만 보며, 아직은 마른 침으로 삼킬 용기가 없어 숙제처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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