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
2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 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잎이 훈김에 떤다. 화분(花粉)도 난[飛]다. '꽃이여
!'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薔薇)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薔薇)와
마주 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薔薇)되어 오는 것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산에 피는 꽃은 갈 봄 여름없이 혼자서 핍니다.
산에 핀 꽃들을 보면, 대개가 무리를 지어 피어있습니다.
그래도 그 꽃들은 혼자서 핀 것 처럼 느껴집니다.
제법 키가 큰 꽃들은 무리를 지어 어깨를 겨누어 피고 있습니다,
제 몫 제 몫으로 피고 있지요.
꽃들은 각각 보고 싶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습니다.
간혹 같은 쪽을 보고 있는 꽃들도 있지만, 그 꽃들은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멀리서 같은 곳을 보고 있지요.
가까이에서 핀 꽃들은 같은 데를 보지 않습니다.
각각 본 곳을 각각 떠듭니다.
꽃들은 옆에 꽃이 본 것을 들으며,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해를 못하기도 합니다.
옆에 있다고 해서 꼭 같은 곳을 보지도, 들었다고 해서 꼭 알지도 않는 것이니깐요.
산에 산에는 키 큰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갈 봄 여름 꽃이 피고 있습니다
키가 작은 꽃들은 좀 흩어져 피어있습니다.
그래서 또 혼자 피어있지요.
혼자인데 개들은 멍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타실타실한지....
땅에 딱 붙어서 꽃잎이나 잎에다 흙 한덩이 쯤은 얹어놓고, 턱 걸터 앉은 폼이지요.
그러고는 혼자 피어있습니다.
키 작은 꽃들은 이웃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흙과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흙이 해주는 이야기는 키 작은 꽃의 뿌리 이야기입니다.
키 작은 꽃은 제 뿌리가 어디로 뻗어있는지 모릅니다.
흙의 이야기를 듣느라, 땅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제 뿌리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혹, 제 뿌리가 돌에 걸렸다고도 하고
지금은 푹 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제 뿌리인데도 아픈 것도, 기분이 좋은 것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산에 산에는 키가 작은 꽃도 핍니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핍니다.
꽃보러 새도 가고, 나도 가고, 산에 꽃보러 갑니다.
꽃
서정주
가신이들의 헐덕이든 숨결로
곱게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그 기름묻은 머리박 낱낱이 더워
땀흘리고 간 옛사람들의
노래소리는 하늘우에 있어라
쉬여 가지 벗이여 쉬여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위돌에 택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눌을 보자
꽃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삼힘
비밀한 울음
한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너는
이제도 눈을 들어
여기
암담한
땅위
소란하나 오리려
뼈에 저려 사무치는
고독의 굽이위에
처절한 벼랑 위에
입술을 열고
그
죽어도 못 잊히올
언젠가는 한 번은
허릴 굽혀 맞대올
먼 너의
해와 달의 입술의
입맞춤을 기다려
떨고 있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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